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풍뎅이 1

글쓰기/소설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1. 11. 3. 14:08

본문

시골뜨기 박종인입니다.
뜸했죠? 이젠 이 해도 두 달 남짓 남았네요.
단편소설을 써봤습니다. 몇번에 나눠 칼럼에 올리고자 합니다.
모니터 상에서 보기에 지루하겠지만 그래도 봐주시면 고맙지요.
알찬 가을 되세요.

-종이인형-




*** 풍뎅이 ***


땅거미가 내린다. 거미줄처럼 보이지 않는 줄을 타고 눈물처럼 스르르 내려온다. 어스름이 깔린 풀숲마다 고운 소리가 삐죽삐죽 내비친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기 전에 조율을 하듯이 풀벌레들이 잠시 숨고르기를 하더니 저마다의 소리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제멋대로인데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을 보니 그들끼리의 어울림이 있나보다. 누가 지휘자고 누가 연주자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청중임은 뚜렷하다. 눈물겹도록 기꺼운 청중인 것이다. 혼자 듣기에 너무 아깝고 버겁지만 이 숲속엔 인간이라곤 나밖에 없으니 홀로 감상을 할 수밖에. 어그러진 뼈들이 제 자리를 찾는 것 같고, 굳어진 근육들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 같다. 옹달샘에서 얼음장같은 샘물을 한 움큼 마신 양 머리는 맑은 유리처럼 말짱해졌다. 밝은 하루를 끝내고 어둔 하루를 시작하는 어귀에 서서 나는 기지개를 켜고 새 날의 빗장을 여는 것이다.

병풍처럼 지그재그로 난 비상계단을 따라 도서관 3층으로 올라간다. 한발씩 내딛는 발길에 부러 힘을 준다. 힘이 들기에 그러하다. 내 발은 종일 시달렸다. 골골샅샅이 다니며 물건을 파는 일은 몸을 파는 것처럼 얼굴이 깎이곤 한다. 덩달아 몸도 젖은 빨래처럼 후줄근해진다. 그래서 일부러 종아리에 힘을 주며 계단을 오른다. 도장을 찍듯이 꾹꾹 밟으며 오른다. 그러면 힘이 생긴다. 수수의 줄기를 꽉 비틀어 짜면 조금의 즙이 스며나오듯 근육에 힘이 생기는 것이다.

늘 그 자리, 그 자리에 앉으면 피로가 싹 풀린다. 눈에 익은 책이 꽂혀있고, 손에 익은 필기구들이 한켠에 자리한 내 자리. 칸막이가 되어있어 나만의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진다. 아파트 화장실 안의 작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우고 몸을 담그듯 난 의자에 엉덩이를 바투 붙이고 쉬는 것이다.

책꽂이에 꽂힌 책을 꺼냈다. 낮 내내 고스란히 서있었던 그도 피곤하지 않았을까. 난 비스듬한 독서대에 책을 눕혔다. 눈을 열고 글자를 먹었다. 머리는 그 글자들을 가다듬어 차곡차곡 갈무리를 하였다. 정수리 위의 형광등은 하얀 불빛을 쏘고, 그 불빛은 하얀 종이를 비추고, 하얀 종이는 그 빛을 내 얼굴에 되비쳤다. 내 얼굴이 환해졌다.

여름의 막바지, 밤이면 제법 선선한 기운이 감돈다. 밤하늘의 백조도 나그네새처럼 철 따라 떠날 채비를 하고, 새로운 별자리들이 하늘을 자리하려 한다. 아직도 모기들은 극성이지만 오갈 든 풀잎처럼 기운이 없어 보인다. 불빛을 따라 들어온 벌레들이 형광등에 자꾸 부딪치며 징징거린다. 내일 아침이면 그네들은 죽어있을 것이다. 오늘이 아니라도 내일, 아니면 모래 죽을 운명이니 그리 안타깝진 않지만, 이 건물 안에서 맥없이 죽어야 하는 그들이 측은하다. 그들은 이 건물 안이 아니라 수풀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인공의 불빛에 속아서 문틈 새로 겨우 들어왔지만 다시 나갈 수는 없는 운명, 형광등 주변에서만 맴돌다 지쳐 죽을 가련한 삶인 것이다. 달빛과 별빛을 따라 날갯짓을 하며 짝을 만나고 후손을 남기며 죽어야 하는데, 마약에 중독 된 듯 강한 인공빛에 홀려 자꾸만 모여드는 어리석은 이들. 날벌레야, 너희들을 막는 건물의 방충망은 오히려 너희들을 살리는 보호막인걸 알아야 하리. 아궁이에서 불똥을 튀기며 타는 장작처럼 자꾸만 형광등에 부딪치며 소리를 내는 날벌레들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다시 책을 본다.



펼친 책은 한국사이다. 우리 민족은 인류학상 몽고인종에 속하는 원시 퉁구스족의 한 갈래이며,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구석기시대부터 한반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우리 민족의 주류는 북방계 청동기문화를 가지고 들어온 무문토기인들 이라고 한다. 처음, 그러니까 구석기시대에는 권력과 지배계급이 없는 평등사회였는데 청동으로 발달된 농기구를 제작하여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함으로써 빈부의 차가 생겼으며, 청동무기로 정복전쟁을 하여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로써 평등사회였던 씨족사회는 보다 큰 지역 단위의 군락사회로, 또다시 이웃의 여러 부족들을 복속하여 수천 호를 다스리는 정치적 지배자인 군장이 등장하여 군장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철기가 보급되어 보다 강력한 정치조직인 국가가 성립되었는데,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의 초기국가 중에 고구려, 백제, 신라만이 고대국가로 발전을 하였다.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삼국은 서로 다투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며 발전을 하는 부분까지 지난번에 학습을 했었다.

역사공부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비록 책 속에 나오는 인물들과 같은 시대를 사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 그들의 삶의 통해 오늘날에도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거울 같아서 자꾸 닦으며 들여다보면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거울을 통해 오늘날을 비춰보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어딘선가 풍뎅이 한 마리가 날아와 잉잉거린다. 아마 불빛에 이끌리어 왔나보다. 창문은 다 방충망을 쳤는데 어디로 들어왔지? 전등 주위를 빙빙 돌더니 하필이면 내가 펼쳐놓은 책장에 내려앉아 지친 날개를 바가지같은 껍데기에 접어 넣는다. 금방 다시 날아가겠지 하고 우두커니 그를 바라보았다. 청동갑옷같은 등이 뺀질뺀질하다. 어찌보면 보석같은 모습이다. 어기적거리는 모습을 그냥 보고 있노라니 문득 ‘삶’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저 작은 곤충에게도 생명이 있겠지. 그 생명도 내 생명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이놈은 하얀 종이에 앉아 더듬이를 다듬고 발을 비비고 움씰움씰하더니 아예 다리를 까칠까칠한 종이에 단단히 고정하고 움직이려 하지를 않는다. 무슨 속셈인가? 아예 잠자리를 마련할 깜냥인가 보다. 예상 밖의 상황에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펼쳐진 책장의 내용만 계속 들여다본다. 굳이 책장을 넘겨서 지친 날개를 접고 막 잠을 자려는 그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사냥꾼도 새가 제 품으로 날아들면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데 내 책장에서 지친 몸을 쉬려는 작은 생명을 차마 억지로 쫓아낼 수 없어 책장 넘기는 것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한잠 자고 나면 떠나겠지.

-계속-


반응형

'글쓰기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뎅이 3  (0) 2001.11.09
풍뎅이 2  (0) 2001.11.06
잣나무와 칡넝쿨 (겨울)  (0) 2001.09.22
잣나무와 칡넝쿨 (가을)  (0) 2001.09.20
잣나무와 칡넝쿨 (여름)  (0) 2001.09.2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