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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뎅이 2

글쓰기/소설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1. 11. 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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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펼쳐진 책장의 내용은 신라의 영걸 무열왕에 대한 것이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자리를 잡아 가장 빈약했던 신라가 나중에는 삼국을 아우르는 내용이었다. 약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나라를 이용한 외교정책을 잘 한 덕도 크다고 할 것이다. 싸움에 있어서 때론 주위의 힘을 이용하여 적을 무찌르는 것이 전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외교정책은 한시도 휴식이 있을 수 없다. 대당외교가 바로 우리의 살 길이며 나라 발전의 지름길이다'라고 주장하던 무열왕은 죽어가면서도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라'고 당부하여 결국 신라가 삼국을 아우를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반쪽 짜리 통일이라서 고구려의 그 넓은 영토를 상당 부분 잃어버리고, 외세를 의지한 탓에 한반도 내에서조차 주도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지만, 처음으로 한민족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한 것은 역사적인 일인 것이다.

풍뎅이는 아예 깊은 잠이 들었나보다.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리에 거칠게 돋은 가시들은 종이의 표면에 단단히 달라붙고, 배 아래 집어넣은 오른쪽 뒷다리를 가끔 움찔거린다. 아마도 잠을 자며 무슨 꿈을 꾸는가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하늘 마당 가득한 별들이 눈으로 더듬으니 숫눈밟이를 할 때처럼 뿌득뿌득 소리가 나는 것만 같다. 별들은 왜 저렇게 빛날까. 누가 저 많은 별들은 하늘에 박았을까. 누가 저 별들을 날마다 닦아주기에 저렇게도 반질거릴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별숲을 보노라니 어느덧 내가 우주 속을 나는 것만 같다. 견우와 직녀, 백조와 전갈 사이를 오가며 노니는 어린왕자가 된다.

어린왕자같은 후배가 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때론 주먹코를 훌쩍거리던 그는 지금 미국에 있다. <토지>라는 독서모임에서 만났는데, 고구마처럼 수더분한 민석의 얼굴엔 늘 웃음이 어려있었다. 하지만 감정이 너무 푸짐한 탓에 때론 잘 울곤 한다. 하지만 사내의 체면을 내세우려는지 남 앞에서는 눈물을 비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민석의 일기장엔 자신의 마음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책을 읽은 내용은 물론이고 순간의 감정들을 일기장이라는 그릇에 고이 담으려는 노력이 빤히 드러난다.

어느 날 민석은 내게 일기장을 보여 주며 말했다.
"형, 여기!"
장난기 섞인 표정이다. 때론 그는 말보다는 글을 통해 나와 얘기하는 걸 즐긴다. 순간적으로 나오는 말보다는 궁리하며 고른 단어들을 하얀 종이 위에 가지런히 놓은 글이 더 깊은 대화이기도 하다.
"응."
나는 찬찬히 그의 글을 훑었다. 벼훑이에서 낟알을 훑어내듯.


*** 이불을 개며 ***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할 말이 있노라고,
그것도 무척 그렇다고 한다면,
거기다 미칠 듯이 그리워하기까지 한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위장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배포가 없고,
간이 나쁜 건지 담력이 콩알만하다.
오늘도 나는 그런 나의 건강과 의지를 탓하며 간밤의 이부자리를 갠다.
햇볕 들지 않는 방에서도 알록달록한 이불을 개다가…
학교 다닐 때 좋아하던 '데칼코마니'라는 그림이 생각났다.
반으로 나뉜 한편 종이에 그리는 대로 다른 쪽에도 그려지고 묻어나는 데칼코마니.

몇 장 안 되는 이불을 이리저리 접다가,
철조망으로 접혀진 알록달록 똑같은 들과 산.
저기 경계선까지 만큼의 똑같은 거리 뒤쪽에도 오늘 같은 감상적인 아침이 찾아올 테고,
이만한 방에 앉아 나처럼 이불을 개고 있을 네 생각이 났다.
너의 허름한 이불과 간밤의 불면과 풋풋한 젊음과 뜨거운 연애와 네 건강이 생각나고,
너의 절망, 너의 절망…
생각해내고는 나는 부끄러워 울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네게 나의 못남과 절망이 묻혀질까봐,
그 절망이란 것이 너무 부끄러운 것이라 운 것일까?
아니면, 먼 거리를 날아와 내 맘에 묻혀버린 너의 절망이 이리도 느껴져서일까?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할 말이 있노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것도 무척 그렇다고 한다면…
거기다 미칠 듯이 보고 싶다고 말해야 한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절대로 절망하지 않도록 하시옵고….'라는 공중기도 속에 지나가는 평범한 말 한마디,
너와 내게 한 말 같아 울었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


민석을 보았다. 그는 검문하는 경찰관에게서 자신의 신분증을 건네받아 도로 지갑에 넣듯 일기장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지금처럼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가을이었다. 말없이 나뭇잎을 보고있는 그의 옆모습을, 나 또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민석은 반년 전부터 <토지>모임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어젯밤에 모처럼 전화를 했는데, 만나고 싶다고 하여 만난 것이다. 그는 하늘을 보고 나를 보았다. 나도 그를 보고 하늘을 보았다. 그의 모습은 이별을 앞둔 연인의 모습이랄까, 떠나야 하는데 자꾸 머뭇거리는 모습이다. 달포 후, 그는 미국으로 떠났다. 공부를 하기 위해 간다고 말했다. 벌써 그러께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새 천년을 앞둔 1999년 가을의 일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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