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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와 칡넝쿨 (겨울)

글쓰기/소설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1. 9. 22.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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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冬.

나는 조경사이다.
겨울은 색 바랜 희아리처럼 희끗희끗하다.
눈 덮인 숲에서 어렴풋이 비치는 갈매빛 바늘잎나무는 쑥버무리 같다.
모진 눈보라에도 짙푸름을 간직하는 잣나무는 겨울에 더욱 돋보인다.
여름날 생생하게 우쭐대던 넓은잎나무들은 겨울의 추위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내가 이곳에 왔을 때, 관사 둘레에는 잣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새로 건물을 짓고 나무를 옮겨 심은 것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바닥은 아직 붉은 흙이 드러나 보이고, 듬성듬성 잡초와 칡넝쿨이 자라고 있었다.
잣나무는 아직 빽빽하지 않아 바닥에도 충분한 햇볕을 흘리고 있었다.
관사 밖에 심겨진 나무는 그다지 신경 쓰는 수종이 아니다.
가끔 바닥의 넝쿨들을 제거해 줄 뿐이다.
잣나무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칡은 부쩍부쩍 자랐다.
일이 바쁜 여름에 몇 주 동안 관사의 잣나무를 돌보지 못한 사이에
칡넝쿨은 잣나무를 온통 덮어버리고 말았다.
낫으로 쳐내자 칡줄기는 힘없이 잘리고 말았다.
가을이 되자 그나마 쳐내지 못한 칡넝쿨도 잎이 모두 지고 말았다.
하지만 다음해 봄에 잣나무를 감싼 칡넝쿨은 얌체처럼 잽싸게 새 잎을 내더니 금세 잣나무를 감싸버렸다.
지난해는 손으로도 잘 꺾어지던 줄기가 억세져서 전정가위가 있어야만 잘라낼 수 있을 정도고 질겨졌다.
그만큼 칡넝쿨 제거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잣나무를 감싼 칡덩굴을 벗겨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칡줄기에 감긴 잣나무 줄기는 깊게 죄인 흔적이 있었다.
마치 밧줄로 팔을 칭칭 감았다가 풀었을 때 나타나는 시뻘건 자국 같았다.
그걸 보니 뱀이 개구리를 옭아매어 질식시키는 장면이 떠올라 움찔했다.

거의 죽어버린 잣나무를 바라보는 내 맘은 허망하기만 하다.
잣나무는 저리도 아프면서 왜 진작 아픈 기색을 내지 않았던가?
하긴 활엽수는 몸에 이상이 있으면 바로 증상이 나타나지만
침엽수는 아픈 증상이 겉으로 드러날 즈음이면 이미 치료할 길이 없을 정도로 심해진 상태이다.
그래서 느티나무나 튤립나무는 병이 오면 잎사귀에 금방 증상이 나타나므로 재빨리 조치를 취할 수 있지만
향나무나 소나무는 쉽게 증상이 드러나지 않아 치료하기가 힘들다.

봄이 되면 더 이상의 미련을 버리고 잣나무를 잘라내야지.
잣나무를 휘감고 오른 칡덩굴을 뿌리 채 캐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종이인형-





====== 토박이말 풀이 ======

* 가름 : 사물을 구별하거나 분별하는 일.
* 갈잎나무 :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나무. 낙엽수(落葉樹).
* 깔딱거리다 : 약한 숨을 끊어질 듯 말 듯하게 겨우 이어 나가다.
* 넓은잎나무 : 넓은잎을 가지는 나무. 활엽수(闊葉樹).
* 늘푸른나무 : 가을철이 되어도 잎이 떨어지지 않는 나무. 상록수(常綠樹).
* 떨켜 : 낙엽 질 무렵 잎자루와 가지가 붙은 곳에 생기는 특수한 세포층. 이층(離層).
* 무서리 : (늦가을에) 처음 내리는 묽은 서리.
* 밑동 : 줄기에서 뿌리에 가까운 부분. 굵게 살진 뿌리 부분.
* 바늘잎나무 : 바늘잎을 가진 나무. 침엽수(針葉樹).
* 실오라기 : 실의 동강.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 우듬지 : 나무 꼭대기 부분의 줄기.
* 희아리 : 조금 상한 채로 말라서 희끗희끗하게 얼룩이 진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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