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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와 칡넝쿨 (여름)

글쓰기/소설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1. 9. 20.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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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夏.

나는 칡넝쿨이다.
지난해 늦가을에 줄기는 모든 잎을 스스로 떨구고 말았다.
뱀의 허물처럼 엉성한 줄기만이 나무를 감싼 채 겨울을 지냈다.
다행히 땅 속의 뿌리는 한창때 모아둔 양분이 많이 있어 봄에 새 잎을 틔우기에 충분했다.
우리의 삶은 릴레이 경주를 하는 선수처럼 바통을 넘기며 이어지는 것이다.
봄에 눈을 틔워 잎을 내고, 여름에 꽃을 피우며 바지런히 햇볕을 모아 뿌리를 살찌우다가,
가을이 되어 해가 짧아지며 서늘바람이 불면 널따란 잎을 떨구었다.
우락부락한 곰같은 겨울 앞에선 죽은 척 하는 것이 오히려 사는 방법이다.



이 여름은 내게 한창이다.
그리 길지 않은 이때에 난 잎을 활짝 펼치며 햇볕과 공기를 모아야 한다.
이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삶의 몸부림이다.
멧돼지가 뚱딴지를 찾기 위해 흙을 후비며 쏘다니듯이 난 햇살을 더 받고자 바닥을 샅샅이 핥으며 기었다.
사철나무 잎사귀에 바글바글 매달린 진딧물처럼 땅바닥은 칡넝쿨의 잎사귀가 얼기설기 엉클어졌다.
우리는 뭐라도 손에 잡히면 아득바득 붙잡고 기어올라야 했다.
여의치 않을 경우엔 서로가 엉겨붙어 위로 올랐다.
이것은 많은 양분을 뿌리에 갈무리함으로써 삶을 이어가려는 우리 나름의 깜냥인 것이다.

나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다.
나무는 부름켜가 있어 해마다 나이테를 그리며 줄기가 부피생장을 하지만
내 줄기는 그저 한해만 자라기에 굵어지는데 한계가 있다.
또한 나무는 줄기 안에 단단한 목부가 있어 곧추 서지만 난 설 수가 없다.
대신 줄기가 부드러워 다른 나무를 감고 오를 수 있기에 나무처럼 입체적으로 잎사귀를 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무를 감아 오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본능인 것이다.

마침 곁에 잣나무가 있기에 기어올랐다.
부드러운 내 줄기의 끄트머리는 뱀처럼 잣나무를 감고 올랐다.
잣나무는 스무 살 정도 되어 제법 컸다.
내 연한 줄기는 나무를 안정적으로 감은 후에는 점점 굵어지며 굳어졌다.
이는 나무에 잘 달라붙기 위해서인데, 이것이 잣나무에게 조금은 압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살기 위해 잣나무를 옥죄어야만 했다.
가을이 되면 내 잎사귀는 시든다.
그러나 잣나무는 한겨울에도 그 푸름을 간직하며 살아남지 않던가?
내가 이 여름에 햇볕을 조금 가리며 잣나무를 감았다고 해서 그에게 큰 피해는 없을 것이다.
난 약한 풀이고 그는 강한 나무이지 않는가!

난 쏜살같이 자라서 잣나무를 온통 덮어 버렸다.
멀리서 보면 내 잎만 보여 커다란 칡나무처럼 보였다.
난 우듬지부터 밑동까지 잎을 골고루 펼쳐서 거리낌없이 햇살을 받았다.
난 곁에 듬직한 잣나무를 둔 덕에 다른 칡넝쿨보다 성공한 칡이 되었다.
참으로 뿌듯했다. 하지만 이런 나를 얄밉게 여기는 이가 있다.
바로 조경사인데, 그는 틈틈이 잣나무를 감아 오른 칡넝쿨을 낫으로 쳐내곤 했다.
조경사는 우리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데, 그러면 우리더러 죽으란 말인가?
한때 무성했던 칡넝쿨들이 조경사의 손에 의해 무참히 베어졌다.
다행이 나는 그의 낫을 피해 이 여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이젠 그가 내 줄기를 자르더라도 상관이 없다.
난 이미 충분한 양분을 뿌리에 저장했기 때문에 내년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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