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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와 칡넝쿨 (가을)

글쓰기/소설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1. 9. 20.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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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秋.

나는 잣나무이다.
가을이 되자 숲은 들썩거렸다.
높아만 가는 하늘은 더욱 파래지고, 솜구름은 물위에 둥둥 떠있는 얼음처럼 시려 보인다.
햇볕은 또한 얼마나 까칠한지 모른다.
굳게 닫힌 꼬투리들을 죄다 까발리고, 도도하게 푸르고 굳은 과일들을 나긋나긋하고 무르게 만들었다.
시퍼렇게 뻐기던 나뭇잎들도 저마다 홍조를 띄며 울긋불긋해졌다.

가을 숲은 잔치마당이라도 벌인 양 사람들로 붐볐다.
밤을 따는 손길들, 단풍을 구경하는 눈길들, 버섯을 캐는 아낙들, 잣을 따는 사내들,
덩달아 다람쥐와 청설모도 도토리를 모으느라 바빠졌다.
이렇게 숲은 흥겨운데 난 고즈넉한 꼬락서니로 풀이 죽어있다.
실오라기 같은 목숨을 겨우 붙잡고 버겁게 숨을 깔딱거리는 나는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운명이다.



해가 짧아지고 날이 추워지면 넓은잎나무들은 가랑잎을 스스로 떨군다.
넓은잎나무는 잎자루 부분에 떨켜라는 막을 만들어서 잎으로 가는 양분을 막아버리므로
잎은 맥없이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바늘잎나무는 굳이 잎을 떨굴 필요가 없다.
우리의 잎은 가늘기 때문에 그만큼 겨울에도 수분이나 열을 빼앗기는 것이 덜하고,
우리 몸에 흐르는 수액은 진하기 때문에 웬만한 추위에도 어는 일이 없다.
잎이 좁기 때문에 여름에 넓은잎나무처럼 왕창 양분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대신 사철 내내 꾸준히 양분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 바늘잎은 가랑잎처럼 살짝 스치는 바람에도 맥없이 떨어지고 있다.
잎이 미워서 떨쳐버리는 것이 아니다. 내게 얼마나 소중한 잎인데 그런 짓을 하겠는가?
할 수 있다면 난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내 잎들을 붙잡고 싶다.
하지만 난 그럴만한 기운이 없다.
겉은 아직 그럭저럭 멀쩡할지 모르지만 속은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난 늘푸른나무이건만 갈잎나무처럼 잎이 노래지면 하나둘 잎을 떨구고 있다.
겨울은 그런 대로 버틸 수 있을 텐데 봄이 되어 따뜻해지고 햇살이 따사로워지면
오히려 난 더욱 빨리 죽어갈 것이다.
겨울은 모두가 몸을 움츠리고 있으므로 생사를 가름하기 어렵지만,
생명의 봄은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을 가르는 시금석이 된다.
봄이 되어도 깨어나지 못하면 바로 생명이 없는 것이다.
아, 나는 내년 봄을 기약할 수 있을까?



처음에 칡덩굴이 내게 이런 부탁을 했다.
내 그늘 때문에 햇볕이 가려 살기 힘드니 나를 딛고 오를 수 있게 해줄 수 있냐고.
난 조금은 미안함과 안쓰러움 마음이 들어 나를 디딤돌 삼아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칡넝쿨은 고마워하며 부드럽게 날 포옹했지.
용수철처럼 휘감아 돌며 내 줄기의 끄트머리까지 오른 칡은 흥겨워하며 잎을 펼치더군.
산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이 기쁘게 고함을 지르듯 칡은 연신 흥얼거렸지.
그가 기꺼워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기뻤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얼마나 뿌듯한가?
우리는 서로 얼싸안으며 잘 살았어.

우리가 함께 한 첫해에는 골고루 햇살을 쬘 수 있었지.
아직 칡은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어.
가을이 되어 무서리가 내리자 칡잎은 주접들어 시들부들해지고 겨우 줄기만이 내 몸에 애처롭게 달렸었지.
하지만 새 봄이 되자 줄기에서 새 줄기가 나고 새 잎이 나더니 금세 자라더니 나를 덮어버리더군.
연약했던 줄기는 점점 굳어지며 단단히 날 옥죄었다.
그뿐만 아니라 칡잎이 온통 내 몸을 덮는 바람에 난 햇볕을 볼 수 없었지.
여름이 되자 칡은 더욱 무성해지고,
나는 몸에서 물이 자꾸 빠져나가는데 햇볕을 못 받으니 양분을 만들지 못해 시들해졌지.
칡넝쿨은 이런 내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살 찌우기에만 급급하더군.
가을이 되어 칡잎이 떨어지자 겨우 햇볕을 볼 수 있었지만,
여름의 햇볕에 비하면 약하기 그지없었지.
또한 내 몸을 감은 칡넝쿨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수액이 흐르는걸 힘들게 했다.

그럭저럭 겨울을 나고 봄이 되자 다시 칡은 나를 조이며 감싸더군.
뱀에 감긴 채 큰 눈만 끔벅거리는 개구리처럼 난 옴짝달싹 못하고 시나브로 시들어갔다.
이렇게 죽어 가는 것일까?
더불어 살 수는 없는 걸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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