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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된 지렁이 4 (7)

글쓰기/소설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5. 2.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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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합니다.
칼럼살림꾼 박종인입니다.
아침 하늘 보셨나요? 그지없이 맑고 께끔합니다. 마치 새싹의 연초록빛 같군요. 하지만 오후가 되면 누리끼리해짐은 왜일까요?
며칠 있으면 어린이날입니다. 그들은 새싹처럼 풋풋하고 청아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순수함이 얼마나 남아있을까요? 잠시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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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에 꽂혀있는 종이조각을 펼쳤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책을 읽다가 옮겨 적은 듯한 글귀가 있다.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다.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은 진실하게 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픈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진실하게 절망할 수 없다."

요즘 역기를 가지고 운동을 한다. 팔과 어깨에 실린 쇳덩어리의 무게가 힘겨워 몇 번 하다가 그만둔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운동의 효과가 별로 없다고 하더군. 힘에 부치도록 하기를 반복하면 근육이 단련이 된다는 것이다.

극한 상황.
이는 내 숨은 모습을 드러내고, 날 단련시키고, 카타르시스 효과를 누리게 한다.
극한 상황에 이르기 전에 쉽게 그만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구나. 극한 상황과 깊은 절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대보다는 그 상황에 이르는 과정의 힘겨움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기 때문이리라.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보니 '쑈생크 탈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빗속에서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서있는 그 사내.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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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된 지렁이 4-2

저게 뭘까? 물위에서 너울너울 헤엄치는 모습이 특이하구나.

"물푸름이, 쟨 누구지?"
"저건 거머리인데, 네 사촌뻘이다."

"내 사촌이라고?"
"너와 같은 환형동물이지. 너처럼 몸마디가 있고, 습한 곳을 좋아하고, 햇빛을 싫어하고, 암컷과 수컷을 한 몸에 지니고 있고, 고무줄처럼 늘이기도 하고 용수철처럼 줄어들기도 한다."

쟨 뭘 먹고살까? 설마 흙을 먹는 건 아니겠지!

"거머리는 뭘 먹지? 흙에 사는 내가 흙을 먹듯 물에 사는 거머리는 물을 먹니?"
"아냐. 살아있는 동물의 피를 먹어. 때론 굶주린 거머리가 자기 동료의 피를 먹기도 하지."

"남의 피를 빨아먹는 이가 내 사촌이라니, 달갑지 않은데!"
"거머리는 그리 욕심쟁이가 아냐. 배부르면 더 욕심 부리지 않아. 실제로 몇 개월마다 한 번씩 피를 먹는 것이 일상적이며 단지 삶을 위해 피를 빨 뿐이다. 하지만 자칭 만물의 영장이라고 우쭐대는 인간이라는 동물은 이념, 종교, 의리 같은 쓸데없는 이유로 전쟁을 하며 같은 동료의 소중한 피를 흘린다. 인간이 인간에 의해 피를 흘린 경우가 가장 많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인다고?"
"인간뿐만 아냐. 너와 거머리도 죽인다. 넌 흙을 좋게 하여 인간들의 식량을 증대시키지만 인간은 흙에 독을 뿌려 널 죽이려 하듯이, 인간을 이롭게 하는 거머리도 인간이 뿌린 독 때문에 물에서 살기 힘든 입장이다."

"물푸름이, 거머리가 인간에게 어떤 이로운 일을 하지?"
인간의 피를 빠는 거머리가 인간에게 이로운 일을 한다니 의아한데?

"피를 빠는 거머리의 습성이 인간을 이롭게도 하는데, 까맣게 멍든 눈 주위의 부기를 가라앉혀 시력을 회복시키고, 타박상을 입어 피가 정맥에 정체되었을 때에 거머리를 이용하여 나쁜 피를 뽑아낸다. 거머리가 달라붙어 피를 빨면 아플 것 같지만 거머리 침에는 마취 성분이 있어 통증 없이 굳은피를 제거할 수 있고, 히루딘이라는 혈액응고억제인자가 있어 피가 굳지 않게 해."

"피를 빠는 거머리의 습성이 그렇게 이용되기도 한다니 참 새삼스러운데! 어떤 면에서는 인간들은 참 약아빠졌어. 사실을 철저히 관찰하고, 그 사실을 바탕으로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다양하게 적용하는걸 보니."

거머리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이젠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점점 호흡이 가빠지는데! 자, 이제 물을 떠나 다시 흙으로 돌아가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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