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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된 지렁이 4 (6)

글쓰기/소설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4. 2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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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셔야만 합니다.
칼럼살림꾼 박종인입니다.
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입니다.
이 상쾌함과 촉촉함을 품은 채 넙죽 절 올립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빗소리가 들리더군요. 요즘은 그냥 사무실에서 자는데, 조경반사무실은 조립식이라 빗소리를 실감나게 들을 수 있답니다.

문을 여니 강가의 안개처럼 자욱한 물기가 훅 밀려오고, 노란 개나리는 물방울 맺혀 더욱 선명하더군요.

지난 겨울, 정문에 있던 은행나무를 사무실 옆으로 옮겨심었는데, 언제부턴가 까치부부가 잔가지를 물어와 집을 짓더군요. 비오는 이 아침에 까치는 집을 짓고 있습니다. 어제 볼 때는 엉성했는데 이젠 제법 둥지다운 틀이 잡혔습니다.

둥지를 트는 까치는 알을 품을 꿈을 꿉니다.
우리 또한 생활의 터전에서 나름의 꿈을 품고 살자고 꼬득이며 어깨동무하며 걷습니다.꿈꾸는 나날이 되세요.
-종이인형-



4 (꿈틀이)

저게 뭐지? 아까 물푸름이하고 얘기할 때 밖에서 풍덩하고 들어왔는데 계속 저렇게 매달려 있네. 저 색깔은 물고기들에게 금방 눈에 띌텐데, 가까이 가서 보자. 생긴 것은 뒤집어진 물음표(?) 꼴이지만 보아하니 지렁이 같은데!

"이봐! 거기서 뭐하고 있니?"
"아니, 넌 꿈틀이잖아?"

"맞아, 난 꿈틀이인데, 어떻게 날 알지?"
"네 아버지가 내 어머니이거든, 그리고 내 어머니가 네 아버지이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네게서 풍기는 우리들만의 특별한 신호 때문에 너를 알아보았어. 우리들의 부모는 성스런 의식을 한 후에 네 엄마, 즉 내 아빠는 숲으로 가서 널 낳았고 내 엄마, 즉 네 아빠는 들로 가서 날 낳았단다. 난 두엄더미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에는 내 엄마와 다른 많은 지렁이들이 있었어. 거기는 매우 좋은 환경이라서 많은 지렁이들이 살아. 난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어. 그들은 자신들이 살며 겪은 여러 가지 일들을 모두 내게 알려 주었거든. 넌 어떻게 살았니?"

드디어 아빠 소식을 들었구나. 이렇게 형제도 만나고, 좀 있으면 아빠도 만날 수 있을 것 같구나. 빨리 그 두엄더미로 가서 궁금한 것들을 물어봐야지. 어쩜 그곳에 슬기곶이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난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어. 넌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동무야. 내게 지렁이에 대해 가르쳐 주는 이가 없어서 스스로 그것을 찾으러 나섰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어. 나도 너처럼 살기 좋은 곳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꿈틀아. 지금의 내 신세를 아니?"

"아니. 근데, 왜 매달려 있지?"
"난 곧 죽게 될 처지야. 가장 살기 좋은 곳은 또한 가장 죽기 쉬운 곳이구나. 낚시꾼들은 우리들을 매우 좋아해. 지렁이는 영양분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물 속에서 붉은 몸이 눈에 잘 띄기 때문에 그들은 우릴 미끼로 즐겨 애용해. 물 속에 매달린 날 보고 물고기들은 좋아라고 날 잡아먹지만, 잠시 후엔 그들도 먹히게 돼. 나나, 날 잡아먹는 물고기나 다 피해자야."

"그럼 널 먹으려는 물고기에게 이 사실을 말하면 될텐데?"
"그래, 어떤 물고기는 내 신호를 알아듣고 미끼를 피하지만, 먹을 것에 집착이 강한 물고기는 내 신호를 듣지 못해. 참 어리석지."

"형제야, 네가 죽게 된 이 마당에 널 잡아먹는 물고기를 걱정할 겨를이 있니? 넌 곧 죽게 될 운명이잖아. 난 그저 네가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거니? 이것이 내가 그렇게도 알고자 했던 지렁이의 존재 이유이니?"

이 무슨 가혹한 인연인가! 처음 만나는 동무, 아니 형제가 만나자마자 죽어야 할 운명이라니. 내게 왜 이런 괴로움이 생기는가? 차라리 만나지나 말았으면 이 괴로움도 없을 텐데, 아빠는 어찌 되었을까?

"꿈틀아, 참 앎은 좋은 부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아는 거야. 때론 그 앎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더라도, 사실은 사실로써 받아들여야 해.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인 후, 그것을 극복하거나 회피하거나 적응하는 대안을 가질 필요가 있어. 지렁이의 존재는 때론 미끼의 신세이기도 해. 그러나 그것만은 전부가 아냐!"

형제는 죽음을 앞둔 입장임에도 처연하구나. 어떻게 저런 맘을 가질 수 있을까! 마치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아.

"사실, 죽음이란 그리 두려워할 것이 못 돼. 그저 삶의 한 과정일 뿐이지. 그러나 삶을 가벼이 여기라는 뜻은 절대 아냐. 삶의 일부로서 죽음의 의미란, 죽는 순간까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서 죽어야지, 죽어서 죽는 것은 옳지 않아."
"죽어서 죽는다는 게 무슨 뜻이지?"

"몸이 죽기 전에 마음이 먼저 죽어버린 거야. 생을 포기한 자는 비록 몸은 살아있으나 마음은 이미 죽은 거야. 살아서 죽는 것은, 생의 미련이 아니고 바로 생생한 삶의 의지이자 활력이야."
"나도 전에 죽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어. 그땐 죽음이 최선이자 최후의 선택이라고 여겨졌거든."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들은 그런 변명을 해. 그러나 그것은 최선의 선택도, 유일한 선택도 아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은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없어."
"최선의 선택?"

"삶에 있어 최선의 선택은, 죽는 순간까지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거야. 그것은 삶의 가치를 알고, 사랑하는 몸짓이지. 죽기 전에 엄마는 내게 이런 말을 했었어."
아, 아빠는 죽었구나! 어떻게 죽었을까?

"다른 선택은 되돌릴 수 있지만 죽음만은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도 돌이킬 수 없다라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은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없어. 왜냐면 그 아무리 현명한 선택도 완전한 선택은 할 수 없기 때문이지. 제 아무리 슬기롭더라도 실수의 가능성이 누구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자살)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교만한 생각인가?"
"내 아빠는 어떻게 죽었니?"

"엄마는 '죽음의 밭'에서 죽었어. 그곳은 엄마가 태어났던 곳인데 처음엔 살기 좋은 곳이었어. 언제부턴가 그곳의 지렁이들이 피난을 떠났지. 그 중에 한 지렁이가 그곳의 사정을 얘기했어. 그 밭의 농부가 화학비료와 농약을 자주 하는 바람에 그곳의 흙에 독이 많아 살기 힘들어진 거라고. 지렁이들이 심심찮게 병 걸리고 죽어가기 시작했다는 거야. 몇몇의 지렁이들은 그래도 그 흙을 살리려고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렁이들이 떠났다는 거야. 엄마는 그 소식을 듣고 그 '죽음의 밭'으로 들어갔어. 모두가 떠나는 그곳으로 말이야. 나는 울면서 말렸지만 엄마는 내게 참 삶과 참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떠났어. 그게 마지막 엄마의 모습이었지. 달포 후 그곳에서 나오는 한 지렁이로부터 엄마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
"아빠......."

"엄마가 죽은 후, 난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는 것 못지 않게 어떻게 죽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었어. 꿈틀아, 우리들의 엄마아빠처럼 우린 살아서 죽자."

저기서 잉어 한 마리가 다가오고 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다. 점점 다가오는데.

"형제야, 저기 잉어가 우리에게 다가와."
"그렇구나.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젠 이별해야 할 것 같다. 넌 많은 가능성을 품은 지렁이다.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라.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어. 살아있는 한 절망은........."

고요한 수면에 한바탕 요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내 물결이 잦아들고 아무 일도 없던 것마냥 수면엔 잔잔함이 감돌고 있다.

안녕, 형제여! 넌 죽는 순간까지도 삶의 의지를 품었다. 생의 의지가 가장 강할 때는 바로 죽는 그 순간이구나.

"꿈틀아, 힘들겠지만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라."
어디서 나타났는지 물푸름이가 곁에 있었다.

"물푸름이, 넌 모든 것을 알고 있었구나."
"삶이란 살아있음으로 가치 있는 것이다. 쥐며느리처럼 제 생명을 버리는 일은 절대 없기 바래. 그 어떤 핑계와 사정도 동정(同情)은 될지언정, 정당(正當)함은 아냐. 도마뱀이 제 꼬리를 끊어버리는 것, 게가 제 다리를 잘라버리는 것, 밀알이 제 몸을 사그라뜨리는 것은 죽는 행위인 것 같으나 실은 사는 행위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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