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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된 지렁이 3 (5)

글쓰기/소설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4. 10.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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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 안녕하시죠? 칼럼살림꾼 박종인입니다.

이 봄에 바람맞지 마세요.
송화가 날리기엔 아직 이른데 하늘은 온통 누리끼리합니다. 요즘처럼 황사가 심한 날에는 밖에 안나가는게 좋겠지만, 난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폴딱거리며 싸돌아다닙니다.

봄은 노란 계절인가요? 지천엔 민들레가 노랗게 땅을 덮고, 산자락엔 개나리, 산수유, 생강나무가 꽃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하늘엔 노란 모래가루가 날립니다. 황사가 지나면 송화가 날리겠죠!

-종이인형-


*** 흙이 된 지렁이 ***

3

햇볕 따가운 남쪽바다에서 물김이 너울너울 떠올라 한 무리의 구름송이를 이루었다.
햇볕을 받는 곳의 위치와 모양에 따라 공기의 온도차가 생기고, 각 곳의 온도차로 인해 공기의 흐름인 바람이 생기고, 이 바람결에 몸을 실은 구름송이는 바람결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남쪽바다에서 생긴 뜬구름은 갯바람에 실려 북쪽의 뭍으로 가는데, 북쪽으로 갈수록 차가워져 구름의 물김이 서로서로 껴안아 물방울 되어 땅으로 떨어진다.

한반도로 밀려오는 먹장구름을 보며 하늘지기는 시름에 젖는다. 분명 비는 땅에 좋은 것이지만 땅이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오히려 배탈이 난다.
빗물을 잘 빨아들이려면 땅에는 나무와 풀이 많아야 하고 흙 꼴은 떼알모양이 되어야 한다.
벌거숭이 맨땅이거나 홑알모양인 흙은 물을 빨아들이는 힘이 약해서, 가랑비엔 별 지장 없으나 큰비가 내리면 소화 못하고 탈나서 대부분의 빗물을 그냥 흘러보내야 한다.

우르르 밀려온 먹장구름은 한반도에 비를 흠뻑 뿌리더니 홀가분한 몸으로 떠났다.
얼마의 빗물은 나무잎이 머금고, 일부는 낙엽이 머금고, 나머진 흙이 머금었다. 흙 틈새에 물이 들어차자 토양의 작은 생물들은 숨을 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꿈틀이도 몸을 비틀며 밖으로 나왔다.

비록 비온 후더라도 여름날의 햇살은 지렁이에게 치명적이다. 실컷 비가 내리다가 갑자기 햇볕이 비치면, 미처 피하지 못한 지렁이는 날카로운 햇살에 맞아 신경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한다.

꿈틀이는 피부가 타 들어감을 느꼈다.
'이렇게 꼼짝없이 죽는구나. 숲에 그대로 있었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슬기곶를 찾아 밑으로 내려와 이렇게 황톳길에서 죽음을 맞이하는구나! 나는 무엇을 알았는가? 한가지 안 것은 내가 흙을 팜으로써 식물이 잘 살 수 있다는 사실, 그러나 그게 뭐 그리 대단한가! 나는 단지 명아주 하나를 살리고 이렇게 죽는데, 명아주를 살리는 것이 내 가치의 전부인가? 겨우 명아주 한 개를 살리는 것, 이 앎을 위해 나는 보금자리를 떠났던가! 명아주 한 개의 가치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런 모험을 했던가! 내가 만났던 팽나무 할아범, 흙지킴이, 숲바라기는 이것을 깨닫게 하려고 이곳으로 날 보냈는가? 그까짓 명아주 하나를 위하여 내 하나밖에 없는 온 목숨을 바쳐야 한다니.......'

꿈틀이는 점점 사그라지는 생명을 느끼며 자신을 한심스럽게 여겼다. 하늘지기가 꿈틀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꿈틀아, 하나란 뭐지?"
"하나가 무엇이냐고? 하나는 그저 하나일 뿐이다. 백도 아니고 만도 아닌 가장 적은 수인 한 개일 뿐이야."

"한 생명을 살린다는 것은 뭐지?"
"왜 자꾸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내가 땅을 파서 한 명아주를 살린 것뿐인데, 내가 죽어가는 이 마당에 그딴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꿈틀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수긍하며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나타나서 이상한 질문을 하는 하늘지기가 얄밉기도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지키는 유일한 동무이므로 고분고분 대답을 하였다.

"꿈틀아, 네 말대로 하나는 가장 작은 수인 1이야."
"........"

하늘지기는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꿈틀이에게 바짝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자, 1과 2 사이에는 얼마의 차이가 있지?"
" 1 "

" 그럼, 0과 1 사이는?"
" 1 "

"그래, 1과 2 사이는 1의 차이가 있고, 0과 1 사이에도 역시 1의 차이가 있어. 두 계산에는 1의 차이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반면에 차이점도 있지. 그게 뭔지 알겠니?"
".......?"

"1과 2의 사이에는 보다 '적다'와 보다 '많다'의 차이가 있지만, 0과 1의 사이에는 전혀 '없다'와 조금 '있다'의 차이가 있어. 1은 두 개보다 '적다'. 2는 한 개보다 '많다'. 그러나 0은 전혀 '없다'. 1과 100 사이에는 9 9의 많은 차이가 있지만 0과 1 사이의 '없다'와 '있다'의 차이, 즉 존재의 유무에 비하면 그 9 9는 아무런 차이도 아냐."
".......!"

"꿈틀아! 넌 단지 한 생명을 살렸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네가 살린 명아주 하나가 자라서 꽃을 피우면 수백 개의 씨가 맺혀. 그 수백 개의 씨가 싹트면 수만 개의 명아주가 생기지. 그 명아주는 산소를 만들어 공기를 맑게 하고, 동물에게는 좋은 먹이가 되고, 죽어서는 거름이 되어 질 좋은 흙이 된다. 그리하여 식물이 살고, 동물이 살고, 하늘이 살고, 흙이 살고, 흙 속의 네가 잘 살 수 있어. 네가 비록 한 명아주를 살리고 죽더라도 네 행동은 매우 가치 있는 거야."
"가치!"

꿈틀이는 가물거리는 의식으로 중얼거렸다.

"가치 있는 존재는 비록 작으나마 그 가치가 가장 값있게 쓰이기를 바라지.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요구할지라도 말이야. 나락 한 톨이 있었어. 이 나락은 썩지 않으면 자신은 나락 한 톨로서 살 수 있지만, 싹을 위해 자신이 썩으면 많은 나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제 목숨을 기꺼이 바쳤다. 한 톨의 나락이 죽으므로 많은 나락이 산 거야."

하늘지기는 지나가는 구름을 붙잡았다.
터질 것 같이 물을 가득 머금은 먹구름은 하늘지기가 찬 입김을 훅하고 불자 이내 뱃속의 물방울을 모두 게워내었다. 빗물은 꿈틀이를 도랑으로 밀어넣더니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꿈틀이를 실은 물줄기는 점점 모이더니 저수지로 들어섰다.
지렁이는 물 속에 있으면 숨쉬기가 곤란하지만 며칠정도는 버틸 수 있다. 두리번거리는 꿈틀이에게 물푸름이가 다가간다.

"꿈틀아, 햇볕에 말라죽을 뻔했다지? 하늘지기가 널 살리려고 지나가는 구름을 붙잡아 비를 뿌렸단다. 그 빗물이 너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어. 비가 너를 땅위로 나오게 하여 죽게 할 뻔했지만 비가 다시 너를 살렸구나."
"아직도 햇볕에 덴 곳이 따끔거려. 이렇게 물 속에 있으니 조금 나은 것 같아. 숨쉬기가 약간 가쁘지만 견딜 만 해."

"네가 왜 이곳까지 왔는지 아니?"
"글쎄, 난 존재이유를 알고자 슬기곶을 찾는 중인데!"

"물이 너를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해. 다른 것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좋은 것도 과하면 오히려 해롭지."

꿈틀이는 물 때문에 오히려 죽을 뻔한 명아주를 떠올렸다. 멀리 붉은빛이 감도는 물체가 꿈틀거린다. 물고기가 간간이 꿈틀이 곁을 지나가지만 진흙에 파묻혀 있는 꿈틀이를 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물은 흙탕물 때문에 뿌옇게 흐려있다.

"꿈틀아, 흙이 유기물을 먹듯 물도 유기물을 필요로 한단다. 하지만 너무 많은 유기물은 오히려 호수를 병들게 해. 물 속에 너무 많은 질소나 인 같은 양분이 있으면 플랑크톤은 급격하게 늘어나고, 한계를 넘은 플랑크톤이 물 속의 산소를 소비하면 물고기는 산소부족으로 숨쉬기가 곤란할 뿐만 아니라 플랑크톤에 아가미가 막혀 질식된다. 물 속에서는 결국 떼죽음이 일어나는데 이 떼죽음으로 인해 부패가 생기고, 부패균의 호흡으로 산소는 더욱 줄어들어. 산소가 부족한 호수는 결국 서서히 죽어 가지. 물론 물은 스스로 정화하는 자정능력이 있지만, 한계를 초과해서 부영양화된 호수는 어쩔 수 없게 돼."

"물푸름이야, 물을 필요로 하는 명아주는 물이 많아서 죽게 되고, 플랑크톤을 필요로 하는 물고기는 플랑크톤이 많아서 죽게 되는데, 그럼 절대적인 가치는 없는 거니?"

"겉으로 보이는 가치만이 전부인 것은 아냐. 식물에게 물은 분명 가치 있어. 그러나 물의 존재가 가치 있는 것이지, 무조건 물의 많음이 가치 있는 것은 아냐."
"보이는 가치와 보이지 않는 가치?"

꿈틀이가 물었다.
"사람들은 말하지, '물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라고. 이것을 진리라고 여기며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고 강조를 하지. 물론 보이는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빗물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고, 폭포수가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계곡물이 골짜기 아래로 흐르고, 강물이 바다로 흘러. 그러나 물은 아래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지. 바다에서 하늘로 물김이 올라가고, 식물체에서는 흙에 있던 물이 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물의 흐름, 즉 아래에서 위로의 흐름이 있어야 가능해. 그렇다면 보이는 가치보다 숨은 가치가 더 크고 위대한 게 아닐까?"

평온한 저수지에 잔물결이 살랑거린다. 뿌연 흙탕물이 점점 맑아지자 물풀 사이로 헤엄치는 붕어와 송사리들이 보인다. 낚시꾼들이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하나 둘 낚싯대를 걸친다.
물푸름이는 낚시꾼들이 설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들은 저수지를 더럽히는데 한 몫을 단단히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물고기를 잡아가는 것은 저수지에 별 영향이 없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는 두고두고 골칫거리이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길 좋아할까? 산에 가도 바위와 나무에 이름을 새기길 좋아하고, 서로 만나면 명함을 건네며 자신의 이름을 상대의 마음에 새기려고 애쓴다.

그 성깔이 이곳 저수지에서도 드러난 걸까? 자신이 왔다간 흔적을 남기기 위해 라면봉지, 소주병, 빈깡통, 휴지조각, 낚싯줄, 부러진 낚싯대 등등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들은 열 마리의 물고기를 잡아가는 것도 모자라서 남아있는 백 마리의 물고기를 괴롭힌다.

물푸름이는 물 속에 드리워진 지렁이 미끼를 보다가 얘기를 계속했다.

"꿈틀아, 사람들이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라고 말하더라도 우리는 '물은 아래에서 위로도 흐른다'라고 말하자. 우리는 보이지 않는 물의 흐름을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가치도 인정하자."

"문뜩 떠오른 생각인데, 난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것을 보았어. 흙에 있는 작은 공간들이 가느다란 통로가 되어 깊은 흙에 스며있는 물을 빨아올리고 있었어. 그 물줄기가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난 분명히 느꼈어."
꿈틀이는 조금 흥분에 겨워 말했다.

수면에서는 한 떼의 물매암이가 빙빙 원을 그리며 맴돌이를 하고있다. 그들의 눈은 절반은 물위에 나와있고 절반은 물속에 잠겨있어 물 안팎을 다 볼 수 있다.
소금쟁이 한 무리도 물가에서 잔물결을 일으키며 짝을 부르는 신호를 열심히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발에는 기름기가 있어서 물위에서도 마치 얼음 위에 있는 것처럼 빠지지 않았다.

"맞아, 그것을 '모세관 현상'이라고 해. 가뭄이 계속되더라도 식물이 시들지 않는 것은 바로 흙의 모세관현상 때문이야. 겉흙은 말랐을지라도 속흙은 축축하거든. 흙은 모세관을 이용하여 속흙의 물기를 빨아올려 식물이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흙이 모세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냐. 가령 모래흙은 흙입자 조직이 너무 성기어 모세압이 생기지 않고, 찰흙은 흙입자가 너무 달라붙어 이어진 틈새가 없다. 모래흙이나 찰흙의 경우는 서로 극과 극이지만 이 둘이 잘 어울러지면 아주 좋은 떼알구조가 되어 모세관이 잘 생긴다. 꿈틀아, 넌 좋은 흙을 만드는 일꾼이다. 너는 모래도 먹고 찰흙도 먹고 낙엽도 먹어서 이들을 네 뱃속에서 버물러 떼알 흙으로 만들어 다시 밖으로 내 놓거든."
꿈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꿈틀아, 지렁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좋은 가치를 발휘하듯이, 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어떤 건데?"

"생물체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물질에는 물이 들어있어. 만약 공기 중에 물 알갱이가 없다면 지구는 산불로 인해 타버릴 거야. 그리고 바위 속의 물은 매우 적지만 얼면서 불어나는 힘으로 바위를 부숴서 흙의 원료가 되게 해."
"물이 바위를 부순다고?"

꿈틀이는 의아하여 되물었다. 물푸름이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대부분의 흙은 오랜 세월 동안에 바위가 부스러져서 이루어진 거야. 바위를 부수는데는 많은 요인이 있는데, 시간, 온도변화, 햇빛, 바람, 식물의 뿌리 그리고 물이다. 이 물이 동식물을 자라게 할뿐만 아니라, 흙을 만들어서 자랄 수 있는 환경까지 가꾸어 준 것이다."

반쯤은 진흙에 몸을 묻고있는 꿈틀이는 물푸름이가 한 말을 곰곰이 되새기며 물 속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불그레한 색이 유난히 선명한 물체가 바닥에 거의 닿을 듯하게 매달려있다.
그것은 낚시바늘에 꿰인 지렁이가 낚싯줄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계속-

***생강나무
(꽃은 산수유와 비슷하지만 잎, 줄기를 비비면 생강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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