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숲바라기의 말은 매우 어렵구나. 이젠 내가 물어볼까?
"숲바라기, 팽나무 할아범이 말하던 요정이 너니? 그렇다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식물이 시드는 까닭을 아니?"
"네가 시든 식물을 직접 보는 게 좋겠다. 저기 야트막한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에게 왜 시들었냐고 물어보렴."
아, 드디어 수수께끼를 풀 수 있게 되었구나. 빨리 가서 그를 만나보자. 그러나 아무리 빨리 가려해도 꾸물거리는 내 몸이 따라주지 않는구나. 자, 조금만 더 가자. 근데 이상하다. 이곳은 물이 충분한데 왜 식물이 시들까? 혹시 숲바라기가 거짓말 한 것은 아니겠지. 아 저기 시든 풀이 있구나.
"얘, 넌 왜 시들었니? 이곳은 물기가 충분하다못해 많은 편인데 말이야."
"응, 지렁이구나. 난 명아주인데, 다른 풀들보다 곱절의 물을 필요로 해. 물을 얻으려고 옆의 다른 풀들과 치열한 다툼을 하는데 난 그것이 싫었어. 그래서 흙의 요정에게 부탁했어. 쉽게 물을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야. 흙지킴이는 내 요구를 들어주어 뿌리 밑으로 물줄기가 흐르도록 해 주었어. 난 물을 얻기 위해 굳이 애쓸 필요가 없었지. 물은 충분했으니까. 그 후, 며칠이 지났는데 점점 내 뿌리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어. 알고보니 뿌리 주변에 산소가 없는 거야. 공기가 있어야 할 공간에 물이 들어서니 뿌리는 숨을 쉴 수 없었지. 뿌리가 숨을 제대로 못 쉬자, 물은 많이 있으나 물을 빨아들일 기력이 없었다. 그래서 난 이렇게 시들해지고 말았단다. 내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물이 아니라 물을 빨아들일 수 있는 활력이었어. 난 물이 부족하다고 불평만 했지 물을 빨아들이려고 애쓰진 않았어. 내겐 물을 빨 수 있는 뿌리털이 있고,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잎사귀도 있는데 이젠 이젠, 말할 힘조차 없구나."
"저런,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니?"
"모르겠어. 흙지킴이라면 알텐데."
"명아주, 그럼 어서 흙지킴이를 불러보자. 흙지킴이!"
명아주가 불쌍하다. 숲바라기가 당황에게 많은 지식을 전해 주엇듯이, 흙지킴이도 명아주에게 살 길을 알려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제발 나타나다오.
"꿈틀아, 날 찾았니?"
"응. 저 명아주가 너무 가엾어. 시든 명아주를 살릴 수 있겠니?"
"난 그가 바라는 대로 해 주었을 뿐이야. 그의 선택에 대해선 그가 책임을 지는 것, 명아주가 게을러서 화를 자초한 것이니 나도 어쩔 수 없구나. 꿈틀아, 팽나무가 네게 낸 문제를 이젠 알 수 있겠니?"
"이상하게도 식물이 시드는 것은 물이 적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많아서구나. 중요한 것은 재능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가진 재능을 얼마나 잘 사용하는 문제인 것 같아."
"나는 흙 속에 있는 생물들에게 창조주의 뜻을 전한다. 생물의 습성은 매우 치밀하고 질서있고 조화로운 그분의 의지에 의한 거야. 간혹 이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들이 있지만, 우리는 흐트러진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한다."
"흙지킴이,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거지?"
"우리가 누군지 궁금하다고? 우리는 흙의 요정인 나 '흙지킴이', 공기의 요정인 '하늘지기', 나무와 풀의 요정인 '숲바라기', 그리고 물의 요정인 '물푸름이'야."
"흙지킴이, 나 좀 살려줘!"
"명아주, 주위에 있는 풀들이 그저 조용히 땅에 뿌리만 박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이 생존하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한지 아니? 줄기는 햇빛을 받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뿌리는 물을 얻기 위해 돌을 부수는 아픔도 감수한다. 이러한 것들이 연약한 식물들에겐 고된 작업이지만 이 과정을 통해 생존력이 생기는 거야. 환경이란, 식물들에게 항상 좋게만 다가서는 것이 아니거든. 때론 매서운 폭군으로 변하지. 생존력이 없다면 다음 세대를 기약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면 식물을 만든 조물주의 뜻을 저버리는 거야. 생육하는 것과 번성하는 것은 차이가 있는데 '생육'이란 오늘을 사는 너의 모습이고, '번성'이란 내일을 사는 네 후손의 모습이야. 창조주가 바라는 것은 우선 자기가 생육하고 그 다음엔 자신의 후손도 생육하는, 즉 번성하길 바라는 것이야. 너같이 게으른 식물은 '생육'은 할지언정 '번성'은 할 수 없으므로 넌 생육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거야.
"흙지킴이, 정말 명아주를 살릴 방법이 없는거니?"
"꿈틀아,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냐."
"그게 뭔데?"
"그건 너!"
나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나같이 미천한 지렁이가 어떻게 죽어가는 명아주를 살릴 수 있단 말인가? 근데 이상하다! 흙지킴이는 분명 나를 지목하고 떠났단 말이야. 그는 나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흙을 파는 재주밖에 없는데 어떻게 명아주를 살리라는 거지. 흙을 파는 재주밖에 없는 나에게, 흙을 파는 재주, 흙을 파는, 흙을.....
바로 그거야! 흙을 파면 되겠구나. 명아주 뿌리 밑에 구멍을 뚫으면 물빠짐이 좋아져서 명아주가 숨을 쉴 수 있겠구나. 그러면 명아주 뿌리는 활력을 다시 찾아 정상적으로 물과 양분을 빨아들일 수 있겠다. 내가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했지? 흙을 파는 작은 내 재주가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니 너무 기쁘다. 나의 존재도 조금은 가치가 있구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