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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된 지렁이 5 (9)

글쓰기/소설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5. 2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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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귀뚜라미의 신성한 의식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꿈틀이는 가던 길을 재우쳐 잰걸음 하였다. 얼마를 가다가 팽이 같은 집채를 지고 기어가는 달팽이를 만났다.
달팽이는 지렁이보다도 더 느렸다. 머리에서는 네 개의 더듬이가 서로 다투듯 허우적거렸다. 위의 긴 두 더듬이는 끝에 눈이 달려있어 물체를 알아보는 역할을 하고, 아래의 짧은 두 더듬이는 맛과 냄새 등을 느끼는 역할을 한다. 달팽이의 꾸물거림은 꿈틀이가 보기에도 폭폭할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다.

"달팽아, 그렇게 굼뜬 걸음으로 어떻게 적을 피할 수 있니?"
자신보다 더 나쁜 신체적 제약을 가진 달팽이를 안쓰럽게 여기며 물었다.

"난 천적이 나타나면 빨리 숨지는 못하지만 등에 있는 단단한 집으로 숨는다."
꿈틀이는 자신과 사정이 비슷한 달팽이를 만나니 동무를 만난 것 같아 두런두런 얘기라도 나누고 싶어 달팽이의 걸음에 맞추어 꿈틀거렸다.

"꿈틀아! 우린 걸음이 느린 것 말고도 비슷한 것이 더 있는 것 같아."
"그게 뭔데?"

"우린 햇빛에 매우 약해서 주로 밤이나 흐린 날에만 밖에서 활동할 수 있고, 물기가 있는 환경을 좋아해. 또 우린 암컷과 수컷 생식기를 다 가지고 있어."
"움직임이 굼뜬 우리가 암수한몸(雌雄同體)인 것은 나름의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내 짐작으론 우리의 느린 움직임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우린 빨리 움직일 수 없으므로 짝을 만날 기회가 그만큼 적어. 만남이 드물고 힘들수록 그 만남은 의미가 크다. 너나 난 같은 동족을 만나기가 드물므로 두 짝 모두가 암컷도 되고 수컷도 되어 자손을 번식하는 숭고한 사명을 지장 없이 감당하는 것 같구나."
"맞아. 내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다른 이들은 만났지만 지렁이는 만나지 못했어. 내 형제 지렁이를 만났지만 바로 영영 이별을 하고 말았다."

"형제와 성스런 의식을 하는 것은 좋은 관계가 아냐. 자기 가족이나 가까운 핏줄끼리 성스런 의식을 하여 자손을 낳을 경우엔 그들이 가진 나쁜 유전성질이 대물림 할 수가 있거든. 좋지 않는 유전성질은 대부분 열성형질이므로 우성형질과 만나면 드러나지 않지만, 열성형질끼리 만나면 그것이 드러난 성질이 되어 굳어버린다."
"달팽이야, 비록 느린 몸짓이지만 바동거리며 짝을 찾아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 난 짝을 찾을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혼자서도 알을 낳을 수 있지만, 이왕이면 짝을 이루어 자손을 갖고 싶다. 우리에게 부디 아름다운 인연이 있기를 바라자!"

서로의 닮은 부분들을 확인해 가는 것은 가까워지는 몸짓이다. 닮은꼴이란 조금이나마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마음의 샘물이다. 비슷한 환경, 비슷한 정서, 비슷한 관심이 있는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

"달팽이라는 이름이 참 우아한데 무슨 뜻이니?"
"내 모양이 달처럼 둥그스름하고 팽이처럼 동그랗게 감겨 있어서 달팽이라고 부른다. 지렁이는 무슨 뜻인데?"

"지룡(地龍)이라는 말이 바뀌어서 된 것인데, 어떤 이들은 '징그럽다'라는 말이 지렁이로 변했다고도 해. 왜 너처럼 공 모양으로 둥근 것은 귀여워하고 나처럼 길고 꿈틀거리는 것은 징그러워하는지 몰라."

꿈틀이가 자신의 이름에 대한 퉁명스런 풀이를 하는데, 다른 달팽이 한 마리가 다가오고 있다.
두 달팽이는 더듬이를 나풀거리며 서로를 확인하더니 두 몸을 휘감고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서로가 수놈이 되어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진 하얀 큐피드의 화살(戀矢)을 계속 쏘아 상대를 흥분시키며 교미를 하였다. 성스런 의식을 하는 동안 바닥 여기저기에 사랑의 화살이 널브러져있고, 짝의 정자를 서로 충분히 갈무리하였다고 여기자 두 달팽이는 흥분이 사그라들며 떨어졌다.
두 달팽이는 각각 20∼30개의 담배씨만한 하얀 껍데기에 쌓인 알을 흙에 낳을 것이다.

달팽이의 성스런 의식을 바라보던 꿈틀이는 자기의 짝을 찾아 나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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