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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된 지렁이 5 (8)

글쓰기/소설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5. 22.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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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청한 오월,
아까시나무의 달콤한 향기가 콧속을 간지럽히죠? 촌뜨기 박종인 인사 올립니다.

오늘은 교회의 사랑부(정신지체장애인 부서)에서 산행을 했습니다. 강남역에서 일반버스(83-1)를 타고 일원동에서 내려 대모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사랑부 아이들을 데리고 일반버스로 움직여 산에 오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부아이들은 초등학생 또래이지만 세살배기 아이처럼 한시라도 눈길을 뗄 수 없습니다.
버스 안에서 아이들이 이상한 소리를 지르거나 이상한 몸짓을 하면(우리에게는 전혀 이상하지 않는) 승객들은 이상한듯 곁눈질을 합니다.
그들의 말없는 시선에는, 사실 많은 쑥덕거림이 배어있습니다.

대모산을 오르는 길섶에는 비비추, 인동, 황금사철나무, 맥문동 등등이 돌이끼처럼 덕지덕지 모두어 자라고 있습니다.
내 아이는 산에 오르며 길가의 풀을 손으로 움켜쥐어 뽑았습니다. 뿌리에 달라붙은 흙을 털기도 하고 풀잎을 하나씩 뜯기도 하며 흥겨워 했습니다.

산에는 다른 아이들도 많이 왔습니다. 그 아이들은 내 아이를 멀찌감치 떨어져서 쳐다보며 머뭇거렸습니다. 내 아이는 산에 와서 나름대로 신나게 노느라 다른 사람들일랑 아랑곳하지 않는데, 다른 아이들은 자꾸만 내 아이를 힐끔거리며 쳐다보았습니다.
내 아이가 다가가자, 그 아이들은 친절하게도(?) 자기들이 놀던 놀이기구를 내 아이에게 양보하며 한발짝씩 물러났습니다.

나는 오늘 내 귀여운 아이와 산에 다녀왔습니다.
산에는 풀, 흙, 아까시향이 가득했습니다. 참,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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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1

"외롭다."
까만 하늘엔 별무리의 맑은 많은 별빛이 앞다투며 초롱초롱 반짝거린다.

"그립다."
까만 풀섶엔 풀벌레의 맑은 많은 소리가 앞다투며 또랑또랑 울러펴진다.

밤이 되자 꿈틀이는 흙 밖으로 나왔다.
비록 눈이 없지만 별무리의 초롱한 별빛이 보이고, 비록 귀가 없지만 풀벌레의 또랑한 소리가 들린다. 낮 동안 흙속에서 실컷 자다가 밤이 되어 빼꼼 몸을 내밀었다. 햇빛은 싫지만 별빛과 달빛은 기꺼이 반긴다.

하늘의 별빛이 사랑하기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지, 많은 풀벌레들이 나름의 소리를 만들어내며 짝을 부르고 있다. 풀벌레들의 짝을 찾는 노래를 듣노라니 꿈틀이는 더욱 외로움이 사무쳤다.

"달아! 넌 알고있니?"
하늘 귀퉁이에 덩그러니 솟아오른 초승달에게 물어보지만 눈썹 닮은 초승달은 고즈넉이 바라볼 뿐 묵묵부답이다.

"태어난 순간 나에게 정해진 인연이 있다면, 그래서 이제껏 서로를 그리워했다면 이제는 만나고 싶다."
꿈틀이는 달에게 혼잣말을 주절주절 댔다. 달은 말이 없지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 가끔 달을 보며 넋두리를 했다.

꿈틀이 몸에는 변화가 생겼다. 머리 쪽에 있는 회색 띠 모양의 환대 표면이 두드러지게 부풀어서 가락지 모양의 띠막(환상막)이 생겼다. 환상막(環狀膜)은 생식에 관여하는 조직인데, 암수 생식기가 여기에 문을 연다. 산란기가 가까워오면 환대에서 점액이 나와 튼튼한 환상막이 생긴다.

깊은 숲에서는 소쩍새가 간간이 울어대고, 가까이엔 귀뚜라미가 또렷한 소리를 울리고 있다. 귀뚜라미를 바라보던 꿈틀이는 기분이 좋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귀뚜라미의 소리도 경쾌하지만 귀뚜라미의 발랄한 몸짓이 활기있고 생생하였다.

"귀뚜라미야, 넌 뭐가 그리 좋아서 흥겹게 노래를 하니? 네 소리를 들으니 내 맘이 기뻐지고, 네 표정을 대하니 나도 밝아진다."

"노래하기 좋은 밤, 그리고 사랑하기 좋은 밤이다."
귀뚜라미는 흥겨운 인사말을 건네며 연신 말을 이었다.

"밤이 되면 난 옆구리를 비벼대며 소리를 만들어. 때론 우울하고 노래하기 싫은 날도 있지만, 난 한가지를 깨달았어. 보통은 내 맘이 기뻐서 몸이 노래를 부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마음이 우울하여 노래하기 싫은 때에도 억지로 몸을 움직여 흥겨운 소리를 내면, 그 소리에 내 우울한 마음이 달래져서 즐거워진다는 거야."

"몸이란 마음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몸이 맘을 움직인다는 말이니?"
꿈틀이는 귀뚜라미의 말이 의아하였다. 어떻게 몸이 마음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인가? 몸은 마음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인데!

"꿈틀아! 난 기뻐서 노래를 부르지만 노래를 불러서 기쁠 때도 있어. 이것은 체험에서 비롯한 내 깨달음이다. 난 맘이 몸을 지배하거나, 몸이 맘을 지배한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 지배란, 힘의 일방적인 흐름이야. 난 뜻이 한쪽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거니받거니 한다고 본다. 마음의 뜻이 몸을 움직이게도 하고, 몸의 어떤 행동이 맘의 기분에 영향을 끼친다고 여겨. 이것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감정과 행동의 되먹임 같아."

"지금 내 맘이 외롭고 우울한데, 그래서 노래할 맘은 없지만 억지로라도 흥겹게 노래하면 나도 즐거워질 수 있다는거니?"
귀뚜라미는 대답 대신 무척 흥겹게 노래했다.

귀뚜라미의 노랫소리에 이끌리어 다른 귀뚜라미 한 마리가 다가오고 있다. 꿈틀이는 귀뚜라미가 매우 가치있는 동물이라고 여겼다. 노래함으로써 짝도 만나고 자신도 기쁘지만, 노래를 듣는 이들도 또한 기쁘게 한다. 귀뚜리미 두 마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소리와 신호를 주거니받거니 하더니 이윽고 한 몸을 이루었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관계구나!"
꿈틀이가 중얼거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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