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에 꿈틀이가 인사드립니다.
겨우내 얼었던 흙을 한 움큼 쥐어보지 않으렵니까?
물기가 배인 촉촉한 흙은 생명을 키우는 지구의 자궁입니다.
콘크리트 아파트가 물릴 때, 문득 흙내가 풍기는 토방에서 군불을 지피고 자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종이인형-
*** 흙이 된 지렁이 ***
1
깊은 바다처럼 적막과 고요만이 있다. 빛도 소리도 바람도 없다. 꼭두새벽에 안개가 스멀스멀 밀려오듯 꿈틀이는 감각과 의식이 시나브로 든다.
의식이 생기며 간간이 꿈도 꾸는데 꿈속에서 소리를 듣는다.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이고 누구의 소리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대금 갈청의 떨림처럼 끊일 듯 말듯 어렴풋한 소리를 듣는다.
"너는 흙에서 생겨나, 흙에서 생활하다, 흙으로 돌아가리라."
"흙은 생명의 뿌리이며 만물의 자궁이다."
"땅을 독점하거나 파괴하는 자는 결코 그 대가를 피하지 못하리라."
꿈틀이는 잠결에 이런 소리를 들으며 그렁저렁 몸이 불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구러 몸이 커갈수록 의식도 뚜렷해지고, 몸을 감싼 껍데기는 꿈틀이에게 점점 압박을 가한다. 아니, 실은 꿈틀이 몸이 불어나며 알껍데기를 압박하고 있다.
레몬 모양을 닮은 지렁이 알은 처음엔 황백색 이였다가 점차 흑갈색으로 변한다. 꿈틀이는 근 달포 가량 알 상태로 있으며 흙으로부터 본능적인 감각과 지식을 전해들었다.
껍데기는 방패이다. 다양한 환경의 변화, 즉 추위와 더위, 수분의 과잉과 부족, 미생물이나 해충으로부터 보호막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껍데기가 점점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때, 그 때는 껍데기를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준비를 해야한다. 꿈틀이는 알에서 깨어나 맨몸으로 바깥세상을 접한다는 것이 두렵지만, 한편으론 설렘과 기대하는 맘으로 움찔거리며 준비를 한다.
알에서 깨어난 꿈틀이는 처음으로 껍데기 바깥세상을 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부드럽고 거름기가 많은 신선하고 촉촉한 흙이 가득하다. 꿈틀이는 이런 좋은 곳에 자신을 낳은 엄마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바깥은 밤낮의 온도가 다르고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심하지만, 흙 속은 거의 일정하므로 많은 원생동물·선충·톡토기·응애·노래기·각종 애벌레 등이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 유난히 꿈틀이의 눈길을 잡아끄는 애벌레가 있어 그 주위를 서성거렸다.
"안녕, 난 지렁이인데 넌 누구니?"
"........"
애벌레는 아무런 말대꾸 없이 계속 잤다. 머쓱해진 꿈틀이는 안달이 나서 다시 물었다.
"잠보야, 도대체 넌 누구니?"
"........"
역시 반응이 없다. 죽은 것 같으나 분명 살아있다. 애벌레의 몸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
"........"
잠시 침묵이 흐르고, 꿈틀이는 되레 자신에게 물었다.
"난 누구지?"
"........"
애벌레는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난 뭐지!"
"........"
심드렁한 꿈틀이는 언덕을 향했다.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정신이 혼란스러운데 오싹한 느낌과 함께 몸이 잘려 나가는 것을 느꼈다. 퍼뜩 움츠렸으나 이미 몸의 끄트머리가 잘려 나갔다. 그 순간 이젠 죽었구나 했는데,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인간의 발걸음 진동에 두더지는 화들짝 놀라 달아나 버렸다.
꿈틀이는 일단 그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다. 정신없이 가다보니 빈 공간이 나왔다. 아늑하고 고요했다.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꿈틀이는 잘려 나간 제 몸을 고즈넉이 바라보았다. 상처 부위에서는 붉은 체액이 흐른다. 좀 지나면 상처는 회복되고 잘린 몸의 일부도 다시 생기겠지만, 꿈틀이는 자신의 존재가 매우 처량했다. 인간이 아니였으면 자신은 이미 두더지의 뱃속에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곳이 어디지?'
땅속은 분명한데 뭔가 다른 분위기다. 귀퉁이에 팥알만한 쥐색의 둥근 공이 있어 다가가 살짝 건드렸다.
"누구야! 내 명상을 방해하는 작자가."
공인줄 알았는데 그것은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쥐며느리였다.
"안녕, 난 '꿈틀이'라는 지렁이인데 명상을 방해해서 미안해. 실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거든. 알려줄 수 있니?"
쥐며느리는 귀찮아하면서도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이곳은 '창문'이라는 곳이야. 오래된 나무 뿌리의 빈 공간인데, 이 나무는 자신이 겪은 세상살이를 제 몸 곳곳에 간직하고 있으므로 이 나무를 창문 삼아 바깥세상을 엿볼 수 있지."
그곳은 우산살같이 퍼진 나무뿌리 사이사이에 흙이 엉겨붙어 생긴 공간이다.
"근데 넌 왜 공처럼 움츠리고 있지?"
쥐며느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쭐대며 말했다.
"언젠가 바위 밑에 있는데 인간이라는 커다란 동물이 바위를 드러내고 날 발견했지. 난 달아나려고 했으나 인간의 손아귀를 벗어나기엔 너무 느려 잡힐 지경에 이르렀어. 인간이 날 잡으려는 순간 너무 무서워 몸을 힘껏 움츠렸어. 그랬더니 이렇게 몸이 공처럼 둥글게 되어 언덕 아래로 떼굴떼굴 굴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어."
그는 흥분에 겨워 들뜬 맘을 어쩔 줄 몰라했다.
"꿈틀아. 너도 나처럼 몸을 둥글게 할 수 있니?"
"아니."
"그럼, 넌 나보다 열등한 동물임에 틀림없어"
"왜?"
"넌 몸을 둥글게 할 수 없고 난 할 수 있으니까."
뭔가 미심쩍었지만 꿈틀이는 주눅 들어 다소곳했다.
"그런데, 몸을 둥글게 하는 것은 왜 좋지?"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하여튼 난 네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데 넌 못하니까, 나는 너보다 더 우월한 동물이야."
꿈틀이는 생각했다. 자신도 쥐며느리처럼 몸을 둥글게 할 수 있다면 두더지의 습격을 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넌 무얼 먹고살지? 먹이를 찾으려면 몸을 펴고 움직여야 할텐데!"
"전에는 너처럼 낙엽 부스러기를 먹고 흙을 뒤지면서 곤충의 시체를 먹었었지. 그러나 지금은 그따위엔 관심 없어. 난 보다 높은 이상을 가지고 살아. 그래서 명상하며 내가 터득한 이 비법을 연구하고 있지. 흙만 먹고사는 지렁이가 어찌 나의 뜻을 알겠니."
쥐며느리는 몸을 더 움츠렸다. 그러나 힘이 없어 보인다. 어떤 면에서는 쥐며느리가 대단해 보이지만 왠지 싫증이 났다. 몸을 둥글게 하는 것이 대단한지는 모르지만 외부와 담쌓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느낌이다.
머쓱해진 꿈틀이는 그곳에서 상처가 회복되길 기다렸다. 며칠이 지나 회복되자 꿈틀이는 태어난 곳으로 다시 내려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