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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된 지렁이 2 (3)

글쓰기/소설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3. 20.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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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봄날입니다.
별안간 잎샘추위에 화들짝 놀라지만 이미 다가선 봄은 쏜 살(矢)입니다.
엎어지면 코닿은 거리에서 대통령을 대하곤 그 분의 건강을 기원했습니다. 행사를 잘 치뤄 홀가분한 맘으로 오늘밤은 잘 잘 수 있을 것 같군요.
오늘 졸업을 한 경찰대학 16기에게 밝은 미래가 펼쳐지길 바라는 맘으로 칼럼을 엽니다.
-종이인형-


*** 흙이 된 지렁이 ***


2 (꿈틀이)

이곳의 흙은 매우 부드럽고 축축하며 영양분도 충분하구나. 살기에 아주 제격인데! 하지만 난 이곳에 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내겐 존재에 대한 앎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해. 근데, 팽나무 할아범이 낸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지? 과연 식물을 시들게 하는 주요 원인은 뭘까? 식물이 시드는 것은 당연히 물이 부족해서일텐데, 그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럼 뭐지? 이 문제를 알만한 식물을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어, 저게 뭐지! 뿌리치곤 상당히 큰데! 굳이 저렇게까지 뿌리가 굵을 필요가 있을까? 아마 쟨 욕심이 많아서 마구 먹다보니 저렇게 살이 쪘을 거야. 하여튼 쟤는 으스대기 좋아하고 사치스럽고 자아도취에 젖어있는 형편없는 식물인 것 같구나. 혹 쟤는 식물이 왜 시드는지 알고 있을까? 한번 물어봐야지.

"안녕, 난 지렁이야. 넌 누구니?"
"당근이야!"

"황당이지?"
"왜 그렇게 부르지?"

"누런(黃) 당근이니 황당이지."
"쳇, 좋을 대로 부르렴. 꾸물꾸역꾸깃꾸정꾸불꿈틀아."

"쩝, 근데 황당! 혹시 식물이 왜 시드는 줄 아니?"
"아마도 물이 부족하면 시들지 않을까?"

넌 당연히 모를 것이다. 너처럼 살이 부득부득 찐 애가 어찌 그런 것을 알리. 내가 괜히 너에게 물었구나. 넌 그저 살찌우는 데만 신경을 썼지, 다른 풀들이 시드는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야.

"근데, 그건 왜 묻지?"
더 이상 황당과 말할 맘은 없지만 귀찮게 물으니 대답이나 하고 뜨자.

"그건 내 존재에 대한 앎을 얻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야."
"음, 존재에 대해 안다는 것은 중요하지!"

어쭈! 마치 존재에 대해 아는 것처럼 말하네? 정말 꼴불견이로다.

"나도 내 존재에 대해서 알기 전에는 매우 갑갑하였고 혼란스러웠지. 그러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한 후엔 내 삶이 매우 귀중하게 여겨졌어."

아니,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정말 알고 있나봐? 솔깃한데!

"황당, 넌 널 아니?"
"난 태어날 때부터 뿌리가 필요 이상으로 굵어질 기미가 보였어. 주위에 있는 다른 풀들은 제 뿌리와 줄기의 굵기가 별 차이 없는데, 나만 유난히 굵어지는 것 같았어. 그래서 살찌지 않으려고 물과 양분을 거부했지. 난 점점 힘이 빠졌지만 살빼기 위해서는 이런 고통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러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꿈결에 누군가를 만났어. 그는 자신을 풀과 나무의 요정 '숲바라기'라고 말했는데, 내게 당근의 선조를 보여주었어."

"숲바라기?"
"선조의 뿌리는 야생의 어느 풀과 다름없었어. 어느 날, 인간은 우리의 선조를 길들이기 시작했어. 결국 야생당근은 인간에게 길들여져서 지금의 모습이 된거야. 인간에게 길들여짐으로 당근의 숨은 자질이 빛을 본 것이고, 지상 최대의 사명인 종족보존을 더 용이하게 하였지. 인간은 인간을 위해 당근을 길들였고, 당근은 당근을 위해 인간에게 길들여진 거야."

"당근, 어떻게 인간에게 길들여졌다는 것이지? 그리고 인간에게 길들여지는 것을 왜 좋은 것처럼 말하지!"

"농부는 당근의 모성애를 이용했어. 즉 한해살이 당근이 일년 내에 씨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거야. 그러면 야생당근이 번식을 위해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리라는 기대를 했는데, 그 특별한 방법이란 후년에 싹을 틔우기 위해 양분을 뿌리에 저장하는 거야. 농부는 줄기가 자라는 대로 잘라내어 꽃이 필 기회는 빼앗았지. 그러나 당근뿌리는 여전히 살이 찌지 않았어. 이듬해에는 씨 뿌리는 시기를 매우 늦추었어. 미처 씨를 맺기 전에 겨울이 오면 양분을 뿌리에 저장하리라는 기대였지. 그러나 기존의 습성을 바꾼다는 것은 매우 어려워서 한두 번의 환경변화에 쉽게 습성을 바꾸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바람일거야. 하지만 종족보존을 위한 식물의 노력은 눈물겹도록 놀라운 거였어. 야생당근은 한 해에 씨를 맺을 수 없는 상황이 오자, 본능의 경고에 민감하게 반응한 서너 개의 야생당근은 종족보존을 위해 두해살이라는 삶의 방식을 받아들였어. 딸들은 엄마의 성질을 닮는 법, 특성은 바꾸기 힘들지만 한 번 바꾸면 또한 그것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지."

"치, 너희는 결국 인간에게 지배당한 존재구나!"
"일방적인 지배가 아닌 더불어 살기야. 인간은 우리의 숨은 자질을 개발하여 이익을 얻고, 우리는 인간을 통해 종족번식을 효율적으로 해. 이것을 깨달으니 내 비대한 뿌리가 더 이상 거추장스럽지 않고 오히려 뿌듯하게 여겨졌어. 난 인간을 위해 뿌리를 살찌우지만, 더 크게는 당근을 위한 것이야. 인간 좋고 당근 좋은 것이 올바른 모둠살이가 아닐까?"

"당근아, 비아냥거려서 미안해. 실은 심각한 내 문제거든. 난 왜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의문스러워. 넌 당근을 위하고 인간을 위하고 창조주를 위해 살지만, 난 고작 흙을 먹으며 꿈틀거릴 뿐이다. 나도 숲바라기를 만나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겠니?"
"숲의 요정은 항상 우리 곁에 있어. 부르면 언제든지 나타나지. 숲바라기야!"

"안녕, 당근 그리고 꿈틀아."
"응, 다시 만나서 반갑워."

"숲바라기! 아직 의문이 덜 풀린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되니?"
"당근아, 뭔데?"

"한해살이인 내 선조 야생당근이 환경변화에 의해 두해살이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난 창조주에 의해 생긴 창조물이니 아니면 환경에 의해 생긴 진화물이니?"
"창조와 진화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한가지야. 진화는 창조의 한 방법이지."

지금 숲바라기는 당근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한 번 들어보자.

"당근아, 창조주가 생명체를 만들었을 때는 무생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생물로 만들었어. 여기서 '생물'이란,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존재이지. 창조주는 네 몸을 한가지 특성으로 굳게 하지 않고 다양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했어. 진정한 창조란 굳어버린 특성이 아니라 유동적인 특성이야. 이것은 바로 생명력이 있다는 것인데, 변화에 대한 반응이 없으면 생명이 없는거나 마찬가지야. 창조주의 뜻을 헤아려 보렴."
"창조주의 뜻?"

"그것은 네가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거야. 이것은 모든 생명체에 해당하는 것인데, 생물은 더불어 살기 때문이지. 어떤 인간은 자신들만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뜻으로 착각하여 다른 동식물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데 그것은 매우 큰 잘못이야. 인간이 생육하기 위해서는 식물과 동물도 생육해야만 가능하거든. 환경은 씨줄과 날줄이 얼기설기 얽힌 커다란 그물이야."

나와 당근도 관계 있고, 나와 인간도 관계 있다는 얘긴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흙이 나와 관계 있다는 얘긴 이해가 되지만 나무, 돌, 물, 풀 등등이 나와 어떤 관계를 가질까?

"창조주는 자신이 만든 생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길 바래. 다양한 변화에 대한 대안을 생명체의 깊은 곳에 잘 보관했는데, 본능의 경고가 울리면 그 대안이 활동을 해. 이것은 창조주가 슬기롭고 알뜰하게 생명체를 만든 방법인데, 모든 생물에 날개가 있고 다리가 있고 발톱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고 뿌리가 있고 잎이 있고 가시가 있고 넝쿨손이 있다면 그건 낭비일 뿐이야. 조물주는 당장 필요 없는 기능들은 생명체의 깊은 곳에 그 가능성만을 보관했어. 본능의 경고가 울리면 그 가능성이 활동을 하는데, 가령 포도나무의 눈은 잎이나 꽃이 피어 열매가 생기지만, 흙에 묻히면 그 눈에서 뿌리가 생겨. 모시풀이나 삼은 낮의 길이에 따라 암컷이 수컷으로 변하고, 수컷이 암컷으로 변하기도 해. 진딧물은 봄·여름엔 모두가 암컷이 되어 새끼를 까다가 가을이 되면 암컷 일부가 수컷이 되어 교미해서 알을 만듦으로 겨울을 이기는 대안을 가져. 이러한 생태는 환경의 변화에 대한 나름대로의 살아남기 위한 반응인데, 이것이 바로 '생의 의지'야. 그런데 요즘엔 환경그물의 그물코가 자꾸 뜯겨지고 있어 안타깝구나!"

"환경그물이 망가지고 있구나!"
"창조주는 지혜가 많은 분이야. 너희들을 만들 때 여러 가능성들을 너희 몸 안에 심어 두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난 형질은 아니지만 극한 상황에서는 그 가능성이 활동을 한단다. 야생당근이 겨울을 이기고 이듬해에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은, 극한 상황에 의해 잠자고 있던 기능이 깨어난 거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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