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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수필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1. 5. 18.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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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자리를 떴다.
다시 올 곳이지만 지금은 뜬다.
시집 한 권을 손에 들고 베냥에 쑤셔넣은 옷가지처럼 나를 버스에 집어넣었다.
지정된 자리에 앉힌 나는 옴짝달짝 못하도록 안전벨트까지 매어졌다.
사과괘짝같은 사각버스는 검은 선을 따라 미끄러지며
유리에 적힌 목적지를 향해 꾸역꾸역 달려간다.
갈가의 나무는 부리나케 달아나고 멀찌감치의 산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한다.
기사를 포함하여 달랑 일곱명을 태운 45인승 버스는 가뿐하게 달린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버스는 구불구불 국도를 따라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나아간다.
갈매빛 산은 그것을 보는 눈이 초록으로 물들 정도로 진하다.
길따라 흐르는 계곡물은 서울을 향하는데,
버스는 연어처럼 물길을 거슬러 산으로 간다.

두어 시간이면 도착하겠지 했는데 실은 갑절이 걸렸다.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고 부러 잠을 청하면서 슬쩍슬쩍 시를 읽었는데
아침에 서울을 떠서 한나절이 지난 정오에 안동에 다달를 때 시집은 이미 내 눈에 먹히고 말았다.




*** 그후로는 모든 것이 행복이었다 ***

- 용 혜 원 -

가난을
못할 일 저지른 죄인처럼
가슴에 품고 살았던 시절

몸마저 찌들고
늘 밟히고만 사는 듯해
일어서고만 싶었다

피맺힌 속울음을 울며
살아온 나날들
어둠 속에 처박혀 있던 삶을
동트게 하고 싶었다
가난이란 슬픈 상처를
치유하고 싶었다

내일이 보이지 않아
눈물만 글썽거리며
절망뿐인 줄 알았는데
먹구름이 몰고온
세찬 비가 개이듯이
가난의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난을 이기는 법을 알았다
열심히 살아가는 법을 알았다
내게 있는 것들을 감사했다
그후로는 모든 것이 행복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안동의 태양은 낯선 나를 향해 따가운 햇살을 개처럼 질러댔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내 모양이 왠지 가소롭게 여겨졌다.

풍산 전통한지를 만드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종이로 만든 갖은 물건들이 내 눈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 눈길도 주고 손길도 주었다.
그곳에는 종이인형도 있었다.

덩치 좋은 사장은 닥나무껍질이 수북이 쌓인 곳을 보여주었다.
예전에 시골에 흔하던 닥나무인데 지금은 전국에서 모아도 모자라서 수입까지 한다는 것이다.
닥나무껍질을 삶는 과정과 전통방식으로 종이를 거르는 모습과
한지로 만든 각종 미술작품들을 보여주었다.

하회마을에 갔다.
마을을 에우고 흐르는 낙동강은 무지한 무래톱을 드러내고 있었다.
양반집과 민가의 고가를 둘러보며 마실을 다녔다.
삼신당에는 어른 대여섯이 팔을 벌리고 품어도 미쳐 감싸지 못할 정도로 큰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다.
유성룡선생의 집과 사당,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기념식수한 구상나무도 있다.
마을의 형상이 물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배의 형상이라 마을에는 연못과 돌담이 없었는데,
여왕맞이를 할 때 담장정리를 하며 돌담을 쌓았다고 한다.

안동댐을 향해 가던 중 안동박물관에 갔는데
이미 6시가 지나서 박물관은 문을 닫았다.
주변엔 조각공원도 있고, 옛날 모양의 초가와 기와집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안동의 먹거리인 헛제사밥 식당이 즐비한 언덕을 오르니 드라마 '왕건'의 세트장이 자리하고 있다.
안동댐의 수몰지구에 있던 문화재를 옮겨다놓은 곳이니만큼 다양한 볼거리들이 있었다.
석빙고도 옮겨놓은 것인데 입구에 서니 안에서 선선한 바람이 솔솔 나왔다.

바쁜 중에서 나의 길라잡이 되어준 토박이인 안동아줌마와 헤어진 후 역으로 갔다.
청량리행 열차는 새벽 2시 10분이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극장에 가서 친구를 보았다.
친구가 교도소에서 면회하는 장면을 보니, 내가 친구를 찾아 교도소를 찾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보름 전 그 친구로부터 편지가 왔을 때,
그 친구는 '친구'라는 영화얘기를 하며 우리도 그런 친구가 되자고 적었었다.
10분의 면회시간이 끝나 서로 헤어지는 순간에 면회
온 친구는 감방의 친구를 향해 다음달에 또 오겠다고 고함을 지르며 약속을 했다.
난 한번밖에 가지 못했다. 편지도 자주 못했다. 다음달에 또 간다는 약속도 못한다.

난 떴다. 내 자리를 떴다.
새벽기차를 타고 다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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