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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를 불며

글쓰기/수필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1. 1. 3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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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아버님이 상을 당하여 고창에 다녀왔습니다.
고속도로를 타고 경기를 지나 충청에 이르니 눈이 엄청 내리더군요.
총알처럼 날아오는 눈발은 차에 부딪히며 부리나케 달아났습니다.
이어서 전라에 이르자 눈발이 잦아들더군요. 좁은 땅덩리인데 날씨는 각각 달랐습니다.

밤중에 상여꾼들이 상여를 매고 연습을 하더군요. 구성진 소리가 참 정겨웠습니다.
어릴적 마을의 상갓집에서 듣던 가락입니다. 살고 죽는 것이 인생이지요.
고샅에서는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초승달이 떠있는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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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모니카를 불며

이번에 사랑부에서 새로 맡은 민권이는 일원동에 자리한 정서장애교육기관인 밀알학교에 다니는 열한 살배기 사내아이이다.
지난주에 처음 민권이를 데리고 사랑부 예배를 드렸는데, 자꾸만 나에게서 달아나려고만 했다.
억지로 붙잡아 자리에 앉히면 발버둥을 치며 도망가고, 바닥에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바닥을 치며 징징거렸다.

앞에 앉으면 돌아앉고, 바짝 다가가면 절룩거리는 걸음걸이로 달아나고, 붙잡으면 눈물을 찔끔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만 보면 피하니 참으로 난감했다.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민권의 눈에는 날 꺼리는 기색이 어려있고, 한편으로 두려움도 배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민권이를 억지로 붙안거나 자리에 앉힐 수는 없었다. 그저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했다.
같은 극의 지남철처럼 민권이와 나는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더 달아나는 관계였다.
아마 두어 달은 이런 관계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앞으로 2년 동안 민권이를 돌봐야 한다. 서두르지 말고 지혜롭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전에 맡았던 용희는 종이에 색연필로 끼적거리는 것을 좋아했기에 민권에게도 종이와 색연필을 내보였는데,
코뿔소가 모닥불 대하듯 손을 헤집으며 종이를 밀어내었다.
슬쩍슬쩍 날 살피는 민권이는 내가 자기의 새로운 선생이라는 것을 아직은 잘 모를 것이다.
어쩌면 이미 눈치를 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민권이는 눈치는 있어 보였다.
눈치가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어느 정도는 서로의 뜻을 주고받을 수단이기에.

주중에 민권이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하였다.
민권이는 여선생은 좋아하지만 남자는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또 엄마는 만만하게 여겨서인지 엄마차에 타면 마구 투정을 부리며 물건을 집어던지는데,
아빠차에 타면 무척 얌전하다는 것이다.
이제껏 민권이를 맡은 선생은 다 여선생이었는데 이번에 남선생이 맡게 되어 조금은 걱정도 되었지만,
이제는 민권이도 기세가 잡힐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남자선생이 아이를 맡은 것을 좋게 받아들이겠다고 하셨다.
또 민권이는 그림같은 것을 그리는 것은 무척 싫어하는데 반면에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셨다.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하며 민권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은 감이 잡혔다.

이번주에는 하모니카를 들고 갔다.
사랑부예배 중에는 사이사이 찬양을 부르는데, 찬양시간에 한 손으로는 민권이를 붙잡고 한손으로는 하모니카를 불었다.
민권이가 하모니카 소리에 얼핏 반응을 보였다.
내게서 달아나려고만 바둥거리던 아이가 고개를 돌려 잠깐 나를 바라본 것이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아이의 눈에는 호기심과 흥미가 어려있음을 난 알 수 있었다.
민권이는 예배 내내 돌아다녔지만 난 민권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찬양을 할 때마다 하모니카를 불었다.

민권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바닥을 치며 울었다.
난 내 두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내 손을 쳤다.
내가 두 손을 들어 앞으로 내밀자 민권이도 두 손을 내밀었다. 서로 손을 부딪히며 박수를 쳤다.
아이는 이내 딴청을 부렸지만 나로서는 뿌듯했다.
예배가 끝나고 헤어질 때 두 팔을 벌리며 안자 별 몸부림 없이 그대로 안겼다.
아이와 나 사이의 거리가 한결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하모니카 소리가 아이와 나 사이에 다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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