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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

글쓰기/수필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2. 12. 23.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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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 울 비 *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비는 붉은 땅속에 그대로 스며든다.
굴착기는 깊은 구덩이를 팠다. 움푹 패인 구덩이가 아찔하다.
그 구덩이에서 비명소리가 맴도는 듯하다.

이젠 깜깜한 밤이다.
아직도 도살이 계속 되는지 낮에 근무를 나갔던 직원이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다.
밤근무를 나간 옆자리의 다른 직원은 밤새 이 비를 맞으며 그곳 입구에서 차량을 통제할 것이다.
연말이라 사업 마무리하고 결산하느라 정신 없는데 또 사건이 터졌다.
올 봄의 가축구제역은 인근 지역인 안성, 용인이었으나 이번엔 우리 지역이다.
전쟁때처럼 군인들이 동원됐고, 직원들은 방역근무조를 편성하여 지나가는 차량들을 통제했다.
비상이다.

어제 5마리의 돼지에서 돼지콜레라 양성반응이 보기에 같은 사육장에 있던 2,000마리의 돼지가 떼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멀쩡한 돼지들이 도살을 당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돼지는 외마디 비명 외에는 아무런 반항도 허락되지 않았다. 왜 2,000마리의 돼지가 죽어야 하냐고 물으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 소수인 2,000마리를 그대로 두면 2,000,000의 돼지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제 한 공연을 봤다. '어느 버스기사의 이야기'였다.
버스가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고장난 것이다.
버스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달리는데 저만치 앞에 한 꼬마가 길에서 놀고 있다.
기사가 경음기를 울려도 아이는 길에서 놀고만 있다.
길 오른쪽은 깊은 강이요, 왼쪽은 거대한 암벽이다.
버스는 아이를 치든지 강물로 빠지든지 할 상황이다. 기사는 아이를 치고 말았다.
잠시 후, 버스는 오르막길에서 멈췄다. 기사와 승객은 내려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이는 죽어있었다. 그때 승객들은 기사를 보며 나무랐다. 왜 아이를 치었냐고.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아이를 치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었을 것이라는 것을.
승객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기사를 비난했다.
버스기사는 아무런 말없이 죽은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는 아이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그때 승객 중에 하나가 소리쳤다. 저 아이는 기사의 아들이다고.

성탄 전야를 하루 앞둔 오늘.
이천에서 2,000마리의 돼지가 군인들에 의해 죽었다.
난 2,000년 전에 태어난 한 사람을 떠올린다. 다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였던 그 사람.
지금 사람들은 그의 탄생을 와자그르르 축하한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에는 다수의 높은 소리만 있고 소수의 낮은 소리는 묻히고 만다.
이 밤 문득 그 낮은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까만 창 밖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겨울비만 소리 없이 내린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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