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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의 허텅지거리 (3)

글쓰기/수필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12. 14.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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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뜨기 박종인입니다.
눈이 내렸습니다. 복스러운 서설이길 기원했습니다.
그리 많은 눈이 아니라서 짜증날 정도는 아니었고,
함박눈이라서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푸근하기엔 충분했습니다.

눈이 내렸습니다.
나풀거리는 눈은 뭇 사람들의 꿈이 꽃으로 피어난 양 그지없이 곱고 우아하였습니다.
눈처럽 곱고 고운 꿈을 마음에 품고 삽시다.
겨울이 오고 한해가 갑니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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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증 오


지난달 '마티유 카소비츠'감독의 "증오"를 보았다.
프랑스가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종차별과 소외 등의 현실을 다룬 감독은
세계 어디서나 자행되는 체제의 폭력과 억압을 고발하며 이렇게 말한다.


-난 증오한다. 진지한 사람이 아닌데 진지해지도록 강요하는 인간들을
-난 증오한다.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계단의 움직임에 자신을 맡기는 인간들을
-난 증오한다. 모든 구절을 '나'로 시작하는 것을
-난 증오한다. 이런 식으로 의도를 가지고 글쓰는 것을
-그러나....
-난 백인이고, 일을 하며, 파리에서 산다. 나는 '증오'를 가질 아무런 이유가 없다.
-또 그러나....
-교외 빈민가 출신의 당신 친구가 경찰의 고문으로 죽었다고 상상해봐라.
-당신 머리 속에는 무슨 생각이 스쳐 지나가겠는가?


영화가 시작되자 우주에서 화염병 하나가 지구를 향해 떨어지다가,
눈부시도록 시퍼런 지구에 내리꽂히자 불꽃이 화면 가득히 퍼진다.
아니 극장을 가득 메우었다.
나는 그 불길에 홀라당 타버리는가 싶어 화들짝 놀랐다가
아무렇지도 않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영화의 첫머리와 중간, 그리고 끄트머리에 내레이터가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한 사내가 높은 빌딩에서 떨어졌다. 그는 추락하면서
'아직까진 괜찮아, 아직까진 괜찮아.... 추락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냐, 어떻게 착륙하느냐가 문제이지.'
라고 계속 중얼거린다."


끝없이 추락하던 20대, 추락하는 건 두렵지 않았다. 정말 두려웠던 것은 그 끝없는 심연의 밑바닥, 그 어둠의 무지가 두려웠다.
그 바닥의 깊이와 상태, 그리하여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오기가 생겼다. 그까짓 것 끝까지 추락하라지. 언젠가는 끝나겠지. 결국 바닥은 있을 것이 아닌가!
오히려 추락을 즐겼다. 그 쾌락을 말이다. 번지점프의 그 짜릿함을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착륙하는 것이다.



* 자 학 *


사람도
사회도
세상도 증오스럽소


그러나
가장 증오스런 것은 '나'란 말이오
세상은 나에게 관대하여 관심 없기에
나는 자신에게 관대치 않고 관심을 갖겠소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기까지
자신을 학대하리라


나의 진주는 어디에.....
씁쓸한 미소가 감도는구려
(91.11.16)



나는 사회의 증오거리를 보기 전에 나의 증오거리를 보았다.
그리하여 사회의 어떤 부분을 증오하지 않았기에 또한 사회의 어떤 부분을 사랑하지도 못했다.
나 자신의 문제에만 파묻혀 사회를 증오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한 지난날의 나의 처신이 지금의 나에게 큰 빚으로 남는구나.


나는 살고 싶었다. 나는 날고 싶었다.
얼마나 많은 주먹다짐을 하였고 얼마나 많이 이를 악물었나!
'잉게 보르크 바아만'의 시처럼,
모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고, 추락은 내가 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비록 죽음을 끝없는 추락이라고 보더라도 말이다.



<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복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리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
"날개", -이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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