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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보급소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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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12. 7.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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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까만 보자기가 펼쳐진 밤하늘에 바람 가득 품은 돛배처럼 부푼 반달이, 우렁이 논바닥 기듯 슬몃슬몃 기어갑니다. 주변엔 굵은 소금이 널브러져 빛나고요.

내 시선은 유리처럼 반짝이는 소금을 모읍니다.
아침이면 스러질 것을 알지만, 난 소유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저 빛을 내 눈동자에 밤새 머물게 할 수 있다는 게 기꺼울 뿐입니다.

몸을 위해 광야에서 만나를 줍듯, 맘을 위해 창공에서 별빛을 모둡니다.
아침이면 만나처럼 스러져버릴 별빛, 그래서 더욱 고운 걸까요?

20대의 어느 해, 신문배달을 하며 공부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종이인형-


*** 신문보급소에서 ***

"따따따따"
"다다닥"
"드륵"
"탁"
(오토바이 소리, 계단 오르는 소리, 문 여는 소리, 신문 놓는 소리.)

새벽 4시, 경찰대학 당직실.
법화산 자락의 잔잔한 새벽공기를 뒤흔드는 소리에, 슬그머니 다가온 졸음은 화들짝 놀라 달아나 버렸다. 다시 요란한 굉음과 함께 사라지는 저 청년은 어스름이 쌓인 새벽길을 달리며 먼동을 흩뿌리며 달리겠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는 오토바이 소리에 이어 어렴풋이 떠오르는 상념이 있다.

"젠장, 또 비가 오네."
총무는 구시렁거리며 본사에서 발송된 신문꾸러미를 안으로 들여놓았다. 잠결에 이 소리를 들은 나는 지레 걱정스러워 이불을 벗어나기가 죽기만큼 싫었다. 신문배달원은 짚신장수보다 더 비 오는 날을 꺼려한다. 바이 어찌하랴! 비록 짜증스럽고 힘겹지만 독자들에게 신문을 전해야 한다. 이것은 나의 일이니까.
아침마다 힘겹게 잠을 떨치는 현대인들은 아침보다 더 이른 새벽에 곤히 자다가 일어나야 하는 배달원의 시름을 족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광고지를 신문 갈피에 끼웠다. 처음에는 손에 익숙하지 않아서 500부 정도의 광고지를 끼우는데 40분이 걸렸지만 지금은 10분이면 족히 처리한다. 이 일도 숙달되니 도사가 되는구나. 비에 젖지 않도록 신문을 하나씩 봉지에 집어넣고 우의를 입었다. 우의를 입어도 2-3시간 빗속을 쏘다니다보면 흡사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다. 그래서 아예 속옷만 입고 우의를 덧입는데, 처음 그 아스스한 느낌에 몸이 옴찔거리지만 시나브로 젖다보면 개의치 않게 된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던 비가 앞에서 뒤로 날아온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이를 악물고 빗속을 나가는 모습은, 흡사 전쟁터의 람보가 기관총탄이 빗발치는 적진을 행해 나가는 꼴 같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빗길에 미끄러지면 아스팔트 위에 신문이 흩어지고, 봉지에 넣지 않은 신문이 온통 물에 젖으면 언제 터질지 모를 불발탄 같은 심정이 된다.

비가 오면 떠오르는 웃지 못할 사연이 있다.
석이엄마는 개포 9단지 공무원아파트에서 사는 두 아이의 엄마이다. 어느 날 신문배달을 하겠다고 보급소를 찾아왔다. 배달을 해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매우 연약해 보여 배달을 못할 것 같아 지국장님은 반대를 하셨다. 그러나 석이엄마는 열심히 할테니 맡겨만 달라고 당차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배달을 하겠다며 보급소에 오지만 며칠 하다가 힘들다고 그만두는 경우가 왕왕 있다. 새로 온 사람에게 구역을 맡겼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그만 두면 그걸 갑자기 보충하기가 여간 곤혹이다. 지국장님은 나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잘 할 수 있을지가 미심쩍긴 했으나 책임감이 있어 보여 한달 정도는 내가 도와주기로 하고 한 번 맡겨보자고 했다.

나는 양재동으로 배달을 가는 도중에 포이동의 우성아파트에서 석이엄마를 만나 배달을 해 주었다. 새벽에 젖먹이 둘째를 떼어놓고 나오기가 애달프지만, 남편이 아내의 뜻을 존중해주고 도와주니 배달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석이엄마 구역을 마치면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며 이야기를 하였는데, 자기는 결혼하기 전에는 효성그룹 연구소에서 사무직으로 일했었다고 한다. 결혼하니 남편 급여만 가지고 두 아이를 키우며 생활하는 것이 버거워 부업이라도 해보려고 신문배달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막상 새벽에 일어나 이 일을 해보니 생각보다 힘은 들지만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석이엄마의 건강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와 애면글면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의 바닥에서 끓어오름이 느껴졌다.

별 탈없이 배달하기를 보름정도 되었을 때 저녁부터 내린 비가 새벽까지 계속 내렸다. 나는 석이 엄마의 우의와 신문을 챙겨 가지고 우성아파트로 갔다. 혹시 비가 와서 오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석이 엄마는 어김없이 나와주었다. 그러나 표정이 영 좋지 않아 괜히 내가 미안했다. 1동은 석이엄마가 배달하고 나는 2동으로 갔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아 1동으로 가보니 석이엄마는 계단에 주저앉아 울고있었다. 깜짝 놀라 왜 그러냐고 물었는데 계속 울기만 하는 것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위를 둘려보았으나 수상한 인기척은 없다. 어스름 새벽에 주룩주룩 비는 내리고 옆에선 한 여인이 훌쩍거리는데, 정말 난감했다.

"남들은 아직 포근한 이부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훌쩍... 깜깜한 새벽에 비를 쫄쫄 맞으며 신문을 배달하는 자신을 생각하니 훌쩍... 내가 너무 처량하게 느껴져 그냥 눈물이 쏟아졌어. 훌쩍..."

관념적인 삶과 실제적인 삶 사이의 괴리감이 커다란 파도처럼 밀려와 한 여인을 저항할 겨를도 없이 쓰러뜨려 버렸다. 한 달이 지나 첫 월급을 타던 날, 석이 엄마는 고맙다며 내게 양말을 건네주며 말했다.

"종인씨, 난 도저히 이 돈을 쓸 수 없을 것 같아요. 비록 15만원이지만 내겐 150만원보다도 더 가치 있는 돈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보급소를 찾아와서 일정기간 머물다가 다시 자기의 갈 곳을 찾아 떠나간다, 봄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오는 철새 무리처럼.
시골에서 가출하여 올라온 고등학생, 피아노를 사기 위해 배달을 하는 중 2의 여학생, 우유배달을 하며 같은 구역의 신문을 배달하는 실속파 아줌마,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들어온 지방출신 대학생, 학원비를 마련하는 재수생, 경제적 배경이 없는 가난한 고시생, 직장을 다니며 배달하는 억척배기. 신문보급소, 우유대리점, 분식점에서 주야로 일하는 전업 배달꾼 등등.

같은 시각에 어제와 오늘이 공존할 수 있을까?
나는 남보다 일찍 '오늘'을 시작하며 미처 '어제'를 정리하지 못한 채 눈은 풀어져 게슴츠레하고 몸은 가눌지 못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뒷골목에서 종종 만난다. '어제'를 그대로 지니고있는 그들은 이미 시작된 '오늘'에 적응을 못해 골목 벽에, 가로수 나무에, 하수구 맨홀에 어제의 잔재를 토해낸다.

"으왜왝, 으왝."

그 옆을 환경미화원 아저씨, 우유배달 아줌마, 운동하는 할아버지가 지나간다.
새벽은 <늦은 어제>를 사는 사람과 <이른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시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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