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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의 허텅지거리 (1)

글쓰기/수필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12. 6.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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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 나이를 물으면 삼삼한 나이라고 합니다.
벌써 서른 하고도 셋인데, 이젠 거기에 하나를 더할 날도 멀지 않군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가끔 혼자 부르곤 합니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제게 색다르게 다가왔던 삼년 전 이맘 때에 쓴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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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울과 겨울

거울 앞에 섰다.
홀라당 발가벗고 거울 앞에 섰다. 걸친 게 하나 없이 거울에 박혀버린 내 몸뚱어리를 멀거니 바라본다.
역시 나인 거울 속의 그도 오도카니 서서 물끄러미 날 보고 있다. 그의 몸에는 감장빛 멍울과 도드라진 흉터와 자잘한 생채기가 한지에 박힌 닥껍질 쪼가리처럼 닥지닥지 널브러져 있다.

그의 몸에 어린 흐릿한 생채기 하나가 내 머릿속을 살랑살랑 꼬드겨서 잠자고 있는 한 기억을 깨운다. 부스스 깨어난 그 기억은 눈 내리는 날의 강아지처럼 호들갑을 떨며 옆의 기억들도 줄줄이 깨웠다.
그때의 일들이 되살아나 유리문에 미끄러지며 반짝이는 빛살처럼 내 머릿속에서 망둥이처럼 팔딱거린다.
쪽에서 뺀 물이 더 쪽빛이듯, 되살아난 기억이 현실보다 더 생생하구나.

입초리를 슬쩍 올리며 슬몃슬몃 웃음을 비치는 내 모습이 왠지 어정쩡하다. 강어귀에서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듯 볼우물처럼 오롯하게 패인 입가에는 슬픔과 기쁨이 얼기설기 엉키어 야릇함이 감돌았다.

몸이 옷을 입는다.
솜처럼 보드라운 속옷을 입고, 단짝처럼 어울림 좋은 다음 옷을 입고, 마지막으로 때깔 좋고 맵시 좋은 겉옷을 입었다. 그리고 다시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나를 빤히 쳐다보며 수염을 다듬고 머리를 매만지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그리고 갖은 표정들을 지어본다.
윗눈썹을 치켜올려 보기도 하고, 한쪽 눈을 찔끔 감아보기도 하고, 볼에 공기를 가득 담고 복어처럼 부풀려 보기도 하고, 금붕어처럼 입을 삐죽 내밀어도 본다.
거울 안에는 별꼴의 그가, 아니 내가 있다.

겨울 앞에 섰다.
정수리에 부은 물이 목덜미를 걸쳐 등줄기를 타고 사타구니에서 다리죽지로 갈라져 허벅지 종아리를 지나 발꿈치로 흘러내리듯, 이 해의 첫머리인 세초에 시작하여 어느덧 끄트머리인 세말에 이르렀다.
이 해의 수많은 얘깃거리들은 시루 안의 떡처럼 추억이라는 그릇 안에 켜켜이 쌓여갔다. 한 해를 되돌아보니 아쉽고 서운하여 마음은 여울목처럼 심하게 일렁거린다.

삶이 세월을 입는다.
들마다 산마다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그 풋풋함과, 자기들끼리 짬짜미를 한 듯 번갈아 함초롬하고 아기자기한 꽃을 피우는 화려한 봄을 입는다.
비온 후 쑥쑥 자라는 대나무처럼 왕성함과, 이글거리는 태양과 두꺼운 먹장구름처럼 의기양양한 여름을 입는다.
울긋불긋 알록달록 갖가지의 때깔로 물을 들이는 단풍같은 다양함과, 달빛에 이슬을 머금으며 향기를 떨뜨리는 들국화처럼 원숙한 가을을 입는다.
그리고 이제 온 세상을 하얗게 감싸안은 그지없이 새하얀 겨울을 입는다.
해말 무렵의 이 겨울, 가는해를 갈무리하고 오는해를 맞을 채비를 한다.

겨울은 거울과도 같다.
거울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제 몸을 살피듯이 겨울 앞에서 사철의 한해를 살핀다. 그리고 서른 살의 나이인 지금에는 한 손의 손가락을 한번 굽혔다 펴며 헬 만큼의 햇수인 지난 20대의 한창때를 살핀다.
해의 갈피와 달의 갈피와 날의 갈피에 틈틈이 어려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은 책장에 쓰여진 까만 글씨처럼 또렷한 것은 아니지만 책장을 넘기듯 나날의 기억을 하나씩 더듬으니 해토머리에 언 땅이 녹듯 잠자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깨어난다.

거울을 보다가 때론 흠칫 놀라곤 한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문득 낯설어 보이기 때문이다. 낯설다는 것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난 항상 나를 보지 않는가? 하지만 이내 끄덕이며 낯선 내 모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늘 나이지만 내 스스로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거울 앞에 섰을 때만 나의 모습을 올곧게 볼 수 있는 것. 달라져버린 자신의 모습에 멈칫 놀라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지만 고분고분히 받아들였다.

겨울이 다가오면 한 해를 다 보낸 양 지레 서운하고 안타까워서 마음은 동동 발을 구른다. 떠오르는 새해를 보며 입을 악다물며 다짐하고 주먹을 굳게 쥐던 날이 너무나 생생한데, 이제 그 다짐은 부도 맞은 약속어음처럼 내 둘레를 횅하니 나뒹굴고 있다.
매듭을 짓는 것이 내게는 왜 이리도 어설플까! 벌써 서른 번이나 격은 겨울이지만 그 어색함은 감출 수 없구나.

지금은 내 나이 서른, 서른이라서 더 서러운 걸까?
서른은 어떤 의미를 내게 던질 것인가? 거울 앞에서 몸을 살피듯 겨울에 이르러 한 해를 갈무리하고자 한다. 또한 서른 살이 된 지금에 지난 20대를 돌이켜 보며 허텅지거리를 뇌까려본다.

지금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어릴 적부터 눈을 많이 보았지만 눈 내린 숲이 이렇게 아름답다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며 마냥 설레며 눈 덮인 하얀 세상을 바라본다.

수양벚나무, 수수꽃다리, 백당나무야!
넌 지난봄과 여름에 꽃을 피고 이내 지더니만 아하, 오늘 그 어느 꽃보다 아름다운 눈꽃을 피우는구나. 저 푸진 하양 앞에서는 그 어떤 까무잡잡함도 가불거리지 못하리!

두 눈으로 많은 눈:을 보고파 하늘을 쳐다보는데 눈:이 눈에 빠졌다. 눈에서 물이 나오는데 이것이 눈물인가, 눈:물인가를 고민하는 것도 기껍기만 하다.

해포 전, 오랜만에 지방에서 올라온 상복이와 동해바다에 갔다. 섣달 그믐께나 정월 초하루께면 홀로 가곤 했던 동해시의 추암해수욕장. 거기엔 모래사장도 있고 울퉁불퉁 바위산도 있어 갖가지 풍경을 두루 만끽하기 좋은 곳이다.
특히 바다에 삐쭉 솟아난 촛대바위 뒤에서 바닷물을 부글부글 끓이며 떠오르는 해말갛고 불그레한 해를 바라보는 것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그지없는 설렘이다.

우리가 찾은 그날은 바다안개가 끼어있어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을 가름할 수가 없었다. 바다안개 속에서 미적거리는 아침해는 그 기운만 설핏설핏 비추고 있었다.

"이젠 20대가 아닌 30대로 접어든다는 생각을 하니 서글퍼진다. 이 해가 간다는 것이 너무 아쉬워 두 손으로 꽉 붙잡고 싶구나. 날 싫어하여 내게서 떠나는 여인을 붙잡듯이, 그런 간절한 맘으로 말이다. 그러나 세월은 떠나는 여인처럼 뒤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가는구나."

안개 너머의 해를 고즈넉이 바라보며 곁에 나란히 선 상복에게 말을 건넸다. 해의 모양이 시나브로 드러나더니 이내 그 부신 빛을 우리에게 비추었다. 막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처럼 깜찍하고 귀여운 느낌마저 들었다. 해는 아직 제 빛을 미쳐 추스르지 못하고 있기에 아직은 가는눈을 한 채 해를 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종인아, 나는 빨리 이 해가 갔으면 좋겠다. 빨리 서른이 되고 싶어."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나는 해에게서 상복에게로 눈길을 옮기며 갸웃했다. 상복은 점점 제 빛을 찾아가는 해를 똑바로 치켜보며 말을 이었다.

"다시 20대를 살라고 하면 나는 싫다. 그 힘든 시절을 얼떨결에 멋모르고 당했으니 참았지만, 다시 그 과정을 거듭 밟는다는 것은 자신 없어. 빨리 서른이 되었으면 좋겠어. 20대에 힘들고 어렵게 겪은 체험들이 30대에 큰 디딤돌이 될 것 같구나. 나 자신이 있고 희망이 있다. 어서 이 해가 갔으면 좋겠어. 빨리 새해가 왔으면 좋겠어."

이 해가 급히 가길 바라는 상복이의 맘과, 이 해가 더디 가길 바라는 나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상(扶桑)에서 부상(浮上)한 불덩어리는 히죽히죽 웃음 지며 함지(咸池)를 향해 하늘 호수를 떠가고 있었다.

이제는 만으로도 어쩔 수 없는 서른 살이다. 흐르는 냇물처럼 시간은 흘러가고.....

-계속-


========= 토박이말 풀이 ========

* 가불거리다 : 가볍게 자꾸 까불다. 가불대다. 까불거리다. 가불가불.
* 갈피 : (책장 따위의) 사이. 일의 갈래가 구별되는 어름.
* 꼬드기다 : (어떠한 일을 하도록) 꾀어 부추기다. 연이 높이 오르도록 연줄을 잡아 잦히다.
* 불거지다 : 물체의 거죽으로 툭 비어져 나오다. 어떤 현상이 두드러지게 커지거나 갑자기 생겨나다.
* 생채기 : 손톱 따위로 할퀴어 생긴 작은 상처.
* 엉기다 : 액체가 한데 뭉치어 굳어지다. 무엇이 한데 얽히고 엇갈리다. 일을 척척 하지 못하고 허둥거리다. 간신히 기어가다.
* 오롯이 : 고요하고 쓸쓸하게. 호젓하게.
* 짬짜미 : 남 모르게 자기들끼리만 짜고 하는 약속.
* 쪼가리 : (헝겁이나 종이 등의) 작은 조각.
* 한창때 : 가장 원기가 왕성할 때.
* 해토머리 : 언 땅이 녹기 시작할 때.
* 허텅지거리 : 일정한 상대자 없이 들떼놓고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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