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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의 허텅지거리 (4)

글쓰기/수필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12. 19.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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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결같은


느티나무는 타는 듯한 노을빛으로 물들고,
백합나무는 얼핏설핏 참외빛으로 물들고,
은행나무는 샛노란 달빛으로 물들고,
메타세콰이어는 자잘한 황금빛으로 물든 가을.
갈빛이 그윽한 학교에 한 가닥 소슬바람이 불자
알록달록한 나뭇잎들은 암 환자의 머리털처럼 맥없이 빠지고 말았다.

둥치에 쌓인 나뭇잎을 쓸 생각도 없이 그대로 두었다.
이따금씩 헤살 궂은 바람이 뱀장어처럼 다가와 나뭇잎을 건드리면,
졸던 물고기처럼 화들짝 놀란 나뭇잎은 한차례 들썩거리다가 다시 노루잠에 빠져든다.

끈 떨어진 망석중처럼 망설거리는 낙엽을 보다가 흐트러짐없이 꼿꼿한 바늘잎을 본다.
비록 철 따라 갖가지의 때깔로 치장하지는 않더라도
늘 푸름을 간직한 늘푸른나무가 더 우아하고 곱게 보이는 까닭은 뭘까?
너무 자주 변하는 세상에 살다보니 한결같은 것이 그립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까!
서른살의 가을엔 낙엽보다는 늘푸른잎이 더 마음에 기껍게 느껴졌다.

나는 보았다.
한여름에 그 푸름을 뻐기며 우쭐대던 아까시나무, 등나무, 칡덩굴이
늦가을 무서리에 그렇게도 힘없이 사그라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곱살한 미색(米色)의 진주처럼 아름다운 목련꽃이 무척 탐스럽고 소박해 볼 때마다 함박웃음을 지었는데,
잎이 채 돋기도 전에 가뭇없이 진 것을.
땅에 떨어져 짓무러진 꽃잎은 너무 초라하고 볼썽사나웠다.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
미인의 아름다움이 피부 한 겹이듯이 꽃의 아름다움도 열흘뿐인 것을,
그리고 그후에는 아름다운 만큼 추함이 있다는 것을,
더불어 어떤 이의 행복함(일반적으로 돈 많고 명예 있고 높은 지위 등등)의 뒤에는 남모를 아픔이 있다라는 것을,
천석꾼은 천 가지의 고민이 있고 만석꾼은 만 가지의 고민이 있다라는 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가난함에도 행복이 있다라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아픔도 있지만 기쁨도 있는 것이고 이것을 인정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상황은 변하더라도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지혜인가!
그래서 선인들은 사람의 일을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였나!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세 가지를 가지고 오라는 명을 받은 천사는 지상에 내려와 여러 날을 헤매다가
들녘에서 이슬 머금어 아침햇살을 반짝이는 예쁜 들꽃을 보았다.
바로 이거야, 천사는 아름다운 들꽃을 조심스레 꺾어 품에 고이 안았다.
어느 마을에 도착하여 쉬고있는데 꼬마들이 고샅에서 즐겁게 뛰놀며 웃고 있었다.
천사는 그 해맑은 어린아이의 웃음을 상자에 고이 담았다.
밤이 되자 아이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는데,
어느 집에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가 사랑스런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사는 그 어머니의 사랑을 품에 담았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가지,
즉 꽃과 어린아이의 미소와 어머니의 사랑을 담고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가던 천사는
사정이 생기는 바람에 한참 후에 하늘나라에 도착하여 품에 있는 지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꺼내보니,
꽃은 이미 시들어 볼품이 없고 어린아이는 자라서 천진난만함이 사라졌고
오직 어머니의 사랑만이 그대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한결같은 사랑이다.

-계속-


===== 고사성어 풀이 ======
* 새옹지마(塞翁之馬) : 국경 근처에 살고 있는 노인이 기르던 말이 달아났는데,
얼마 뒤에 그 말이 좋은 말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 때문에 병역이 면제되어 많은 젊은이가 전사하는 변란 중에도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즉, 사람의 행 불행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므로 오늘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너무 좋아할 필요는 없고,
또한 오늘 나쁜 일이 생겼다고 해서 너무 낙심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출전: 회남자. 인간훈 [淮南子. 人間訓]


======= 토박이말 풀이 =========
* 가뭇없이 : (눈에 띄지 아니하여) 찾을 길이 감감하다. 흔적이 조금도 없다.
* 곱살하다 : (얼굴이나 성미가) 예쁘장하고 얌전하다.
* 그지없다 : 끝이 없다. 헤아릴 수 없다.
* 노루잠 : 깊이 들지 못하고 자주 깨는 잠.
* 늘푸른나무 : 사철 내내 푸른 상록수.
* 둥치 : 큰 나무의 밑둥.
* 망석중 : 나무로 만든 꼭두각시의 하나. 팔다리에 줄을 매어, 그 줄을 움직여 춤을 추게 함.
* 무서리 : (늦가을에) 처음 내리는 묽은 서리.
* 미색(米色) : 겉껍질만 벗겨 낸 쌀의 빛깔과 같은 약간 느르께한 빛깔.
* 바늘잎 : 바늘처럼 생긴 소나무나 가문비 등의 침엽수 잎.
* 뻐기다 : 우쭐대며 자랑하다.
* 소슬바람 : 으스스하고 쓸쓸하게 부는 가을 바람.
* 헤살 : 짓궂게 훼방함. 또는, 그러한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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