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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의 허텅지거리 (2)

글쓰기/수필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12. 7.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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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살림꾼 박종인입니다.

자정도 지난 축시(丑時) 무렵, 밤이 깊어갈수록 난 두레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착각에 빠집니다.
시간의 쪼가리들이 눈발처럼 내 주위를 나풀거리는 듯 시간의 흐름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졸려서라기 보다는 새날의 무리 없는 하루를 위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밤새 악몽에 시달리다 새벽에 겨우 깨어났습니다.
깨어날려 발버둥쳐도 깨어날 수 없는 것이 악몽인가 봅니다.
소리를 질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고 달아나려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겨우 고함이 터지며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진짜 잠꼬대를 하고 말았습니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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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간은 흐르는 냇물처럼.

잽싼 초침이 심장 박동 치듯 힘차게 한 원을 빙그르르 돌자 분침은 달팽이처럼 마냥 미적미적 움찔거렸다.
시나브로 분침이 한 원을 빙그르르 돌자 시침은 꽃망울을 벌기 시작하는 장미처럼 살포시 꼼지락거린다.
무딘 시침이 그럭저럭 한 원을 빙그르르 돌자 밀물이 들듯 낮이 지나고,
또 한 원을 빙그르르 돌자 썰물이 나듯 밤이 지나서 이러구러 한 날이 지났다.
달포는 날포 같고, 해포는 달포 같고, 열 해는 해포 같기만 하다.
열 해 전인 스물 살 때나 서른 살인 지금이나 내 키가 그대로이기에 난 세월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지는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 해 전엔 태어나지도 않았던 조카가 어느덧 훌쩍 자라 내 가슴팍만큼 이른 것을 보니 퍼뜩 세월의 흐름이 실감났다.


인생은 재판정이다.
세월이 판사이고 시간이 검사인데, 내 변호는 모모가 맡았다.
시간검사가 허투루 보낸 시간을 트집잡아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몰아붙이자 곁에 선 모모는 날 감싸며 열심히 변호를 해 주었다.
하지만 시간검사에게 잡힌 꼬투리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라서 난 직수굿이 세월판사 앞에 섰다.
판사는 내게서 한창을 거둬들이려고 했지만, 한창을 잘 보낼 수 있도록 한번 더 기회를 준다고 하였다.
세월판사가 이르길,
한창은 구리거울과 같아서 가만있으면 더께가 덕지덕지 앉아 흐릿해지지만 짬짬이 문지르면 항상 반지르르 생기가 도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한창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서 그것을 부릴 줄 아는 자만이 제대로 누릴 수 있다고 했다.


매일 밤마다 아롱다롱 박히어 초롱초롱 반짝이는 별을 보며 거듭거듭 다짐하며 맘을 다잡는다.
잘 살자. 잘 살자. 그래 잘 살아야지. 근데 이상하지? 죽을 정도로 힘이 들수록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솟구친다.
배짱인가, 오기인가! 아마도 생명에 대한 열정이 아닐까?
살아있음으로써 느끼는 그 어떤 고통도 살아있음 그 자체와는 갈음할 수 없는, 즉 살아있음이 대단히 소중하고 감사할 축복거리이다.
'생명이 있는 한 행복이 있다.'라는 톨스토이의 말처럼.
흐르는 냇물을 거슬러 원천지를 향하는 무지개송어의 역동적인 몸짓이 눈앞에서 펄떡거린다.
반면에, 엇갈려 맥없이 떠내려오는 부평초. 그 부평초가 증오스럽다.


* <모모>, 미하엘 엔데(Michael Ende)
- 신종 도시병인 '견딜 수 없는 지루함'을 퍼트리며 시간을 훔치는 시간도둑에 맞서 훔친 시간을 되찾아주는 한 소녀의 이야기로, 항상 시간이라는 괴물에 쫓겨다니는 현대인을 구출하는 모모의 모험활극이다.


-계속-


========== 토박이말 풀이 ==============

* 갈음 : 다른 것으로 바꿈.
* 날포 : 하루 이상이 걸치어진 동안.
* 달포 : 한 달 이상이 되는 동안. 달소수.
* 더께 : 몹시 찌든 물건에 앉은 거친 때.
* 벌다 : 틈이 나서 사이가 뜨다. 맞닿은 자리가 벌어지다. # 밤송이가 벌기 시작하다.
* 살포시 : 매우 보드랍고 가볍게.
* 시나브로 :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다른 일을 하는 사이사이에. 틈틈이.
* 아롱다롱 : 점이나 줄이 여기저기 고르지 아니하게 아롱진 모양.
* 이러구러 : 우연히 이러하게 되어. 이럭저럭하여.
* 직수굿하다 : 저항하지 아니하고 풀이 죽어 수그러져 있다. 직수굿이.
* 퍼뜩 : 얼른. 곧.
* 한창 : 가장 기운이 성할 때.
* 해포 : 두 해는 못 되고 한 해가 훨씬 더 되는 동안. 해소수.
* 허투루 :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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