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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벗 (5)

글쓰기/수필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11. 8.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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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의 살림꾼 박종인입니다.

맥없이 떨군 샛노란 은행잎이 나풀거리는 거리에
자라목처럼 움츠린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며 부리나케 걷습니다.

입동, 무척 춥죠?
이젠 겨울이 다가오니 각오 하라는 듯 으름장을 놓는 모양인가 봅니다.
무성했던 잎을 모두 떨군 채 직수굿이 서있는 백합나무는 계절의 흐름을 눈치 챈 모양이군요.

어제는 장미를 짚으로 감싸주었습니다.
한겨울의 에인 추위를 잘 버텨 새봄에 잎 나고 꽃 피라고.
꼬마의 머리를 땋듯 지푸라기를 빌빌 꼬아서 삐삐머리를 만들기도 하고, 고깔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젠 겨울맞이를 해야 할 때입니다.
이 철, 이 해를 잘 갈무리 하시압!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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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벗으로부터 온 편지

정말 무지무지 오래 있다가 받은 오빠의 편지는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강원도로 가셨다니 이건 축하할 일이 아니겠지만,
도시 한 가운데 있는 저는 오빠가 너무 부럽습니다.

정말 이번 여름방학은 무척 의미가 있었어요.
제일 중요한 일은, 이건 극비인데 제게 아주 좋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거죠.
하지만 문제점도 많아요.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거지꼴을 하고 있다가도
얘를 만날 때만 되면 친구가 입고 있던 옷마저 빌려 입고 나가야 되는 거 있죠.

참, 사는 것이 한마디로 희한해요.
어떤 때는 제가 생각해도 사는 게 너무 비참하고 싫은 때가 있지만, 전 그러면서 크는 것이겠죠?

방학이 끝나갈 무렵, 아빠와 많은 대화를 했어요.
"아빠, 아빠는 어쩔 때 사는 게 싫었어요."
아빠의 대답이 걸작이지요.
"글쎄, 때로는 삶에서 도피하려는 사람이 더러 있더구나. 하지만 그네들은 왜 그리 촌스럽고 구닥다리 같으냐."

오빠.
오빠께서도 지금 고생스러우시겠지만 많은 의미를 주고받는 뜻있는 시간들이 되세요.
저는 다가오는 겨울방학을 다시 기다려야겠어요.

사실, 무더운 여름이면 사람들이 의욕을 잃어버리는 게 사실이거든요.
얼마 전에 본 '개 같은 내 인생'이라는 스웨덴 영화에는 늙어죽기 직전이면서도 색(色)을 밝히는 노인네가 나와요.
아내(그녀도 쭈그렁 할머니죠)에게 들키면 혼날만한 잡지를 시트 밑에 숨겨놨다가
주인공 '잉게마르' 소년이 오면 선정적인 대목을 골라주며 읽어 달라는 장면이 웃음을 자아내는데,
무슨 주책이라거나 노추 같은 따위를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 놀랍도록 신선했습니다.
오히려 삶의 기쁨들이 떠올라 '이래서 인생은 아름답나니' 하는 감명도 심어줬습니다.
이제 여름도 반 이상이 지났습니다.

별들이 더 깊이 심오한 빛을 발해가는 밤.
언제나 쉴새없이 질문하면서도 궁금해하는 조카가 부럽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순수―.
때묻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부럽고도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날이 갈수록 뭔가 잃어가는 게 있는데,,,,,,
오늘도 열심히 그 대답을 자문자답하며 서서히 꿈나라로 가야겠어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Bye. Bye.
1989. 8. 28.
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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