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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전북 군산시 군산우체국 사서함 10-12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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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11. 2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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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글을 쓸 수 없군요.
예전에 쓴 글을 올립니다.

93호 칼럼
"From. 전북 군산시 군산우체국 사서함 10-1291호"
의 그 친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http://column.daum.net/Column-bin/Bbs.cgi/boshing/qry/zka/B2-kB2Zn/qqo/PRMY/qqatt/^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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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 안의 파랑새에게.
뻐꾸기 한 마리가 사무실 앞의 곧추 선 잣나무 끄트머리에 앉아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구나.
때론 가까운 듯, 때론 먼 듯 아득한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자냥스럽다.
새는 제 목청으로 짝을 부르고, 산은 그 밑둥치로 바다와 맞붙고,
어슴새벽은 먼동 트며 이슬아침을 잡아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이네들을 통해서 그 마음을 달래는구나.

12년만의 만남을 위해 설레는 맘으로 군산으로 갔다.
군산 교도소, 밖에서 보는 이미지는 그리 삭막하진 않았다.
재소자들의 수용시설은 볼 수 없었지만 접견실이나 앞에 있는 건물은 일상적이더구나.
네가 있는 곳에 와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맘에 안도가 생기는구나.

'친절 봉사'라는 글씨가 쓰인 접견실 건물에 들어가서 면회를 신청했는데 담당자가 말하길,
오전에 다른 사람이 이미 너를 면회하였기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왔지만 하루에 한번밖에 면회를 할 수밖에 없는 그곳의 규칙 때문에
너와의 12년만의 설레는 만남은 가질 수 없었다.

메모와 책과 얼마의 영치금만 맡기고 돌아서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네가 생활하는 곳을 다녀가니 마음에 조금은 위안이 되는구나.
널 만나러 가는 중에 긴장을 많이 하였다.
얼마나 변했을까? 만나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나? 어색하지는 않을까! 등등.

신작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붕(朋)아,
강산이 한번 변하고도 절반이 변할 세월이 흘렀구나.
교회에서 눈물로 기도하시던 네 어머니의 모습도 생각난다.
박 전도사님과 성도들이 네 집에 가서 가정예배를 드릴 때 너는 집에 없어서 만나지는 못했었다.
아마도 네가 피했던 것 같다.
네 아버지의 정신병 때문에 네 집은 매우 암울하여 어머니는 많이 힘들어 하셨고,
성도들은 네 가정을 위해 다같이 기도를 하였다.

84년 3월 4일, 우리네 어머니는 이불을 머리에 이고 이리로 오시었지.
학교와 기숙사를 둘러보시고 발길을 옮기시던 너와 나의 어머니의 얼굴에 시름이 가득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집은 내가 입학한 일 주일 후에 성남으로 이사를 하였다.
평생 시골의 한 집에서만 살다가 낯선 도시로 첫 이사를 한다는 것이 대단한 모험이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 농촌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거부할 수 없었다.
우린 그 첫 이사 이후엔 매년 한번 꼴로 이사를 하였지만,
시골에서 도시로의 첫 이사가 어머니에게는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그 당시 큰형은 군 복무 중이었고,
둘째형은 고교 3학년이라서 그냥 시골에 남아있었고,
나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리에 홀로 남았고,
여동생만 데리고 성남으로 가는 바람에 우리 4남매는 졸지에 이별을 하였다.
동생은 바로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일년 동안 공장을 다녀야 했었다.

쌀쌀한 날씨에 집에서 가져온 얇은 홑이불만 덮고 덜덜 떨며 잠을 자는 것과,
선배들의 삼엄한 분위기, 돈은 다 떨어지고 집에서는 연락이 없던 그 시절에 내겐 많이 힘들었나보다.
그 때의 내 편지를 받아본 여동생은 한참을 소리내어 울었다고 하더구나.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학비를 내지 않고도 다닐 수 있다기에 전북기계공고에 지원을 하였다.
우리의 생활은 학교라기보다는 군대였지.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운동장에 모여 점호를 취하고 태권도를 하고 7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수업을 받으러 갈 때는 한 반 학생이 전체 모여서 군가를 부르며 교실로 갔고,
선배를 보고 거수경례를 하지 않으면 그날 밤은 기숙사 옥상으로 올라가야 했고,
수시로 인원파악을 하고 정문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하고,
학교의 담은 높은 것뿐만 아니라 교도소처럼 철조망이 빙 둘러 설치되어 있고,
매일 밤 10시의 점호시간과 토요일의 내무사열은 청소와 정리정돈이 지적 당하여 기합을 받을까봐 바짝 긴장되고,
취침시간 이후에는 움직일 수 없었던 그 생활.
그것이 힘들어서 한달 새에 서너 명의 급우들이 인문계를 가겠다는 핑계로 학교를 떠났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여름방학을 맞아 성남의 집에 가보니 집은 부엌도 없는 단칸방 전셋집이더구나.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시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을 하셨다.
어머니는 5시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밤 10시에 들어와서는 집안일을 하다보면 자정이 넘어서 잠자리에 드셨다.
그 어린 여동생은 또래들이 학교 갈 시간에 미싱공장에서 일하고,
방학 때 집이 있는 것이 매우 거북스러웠다.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그리운 ○ ○ 야,
칠거리교회에서 김호, 너, 나 셋이서 기계공고에 왔는데, 너와는 깊은 관계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처음에는 자주 만나기도 했는데 새로운 친구들을 알게 되면서 어영부영 소홀해진 관계가 되었다.
간접적으로 너의 소식을 들었었다.
네 아버지의 병증이 심해지고 네 큰형마저 미처 버렸다는 얘기와
또 어머니께서 집을 나가셨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지만 난 네게 별다른 힘이 되지 못하고 아무 위로를 주지도 못했었다.
내 자신의 문제에 너무 깊이 빠져 허우적대느라 정신이 없었나보다.
그것이 지금은 내게 많은 아쉬움을 들게 한다.

네가 문제학생들과 어울린다는 소식이 들리고 기숙사에서 쫓겨났다는 소식,
그리고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왜 그럴까 하며 안타까워하였지만 네게 찾아가지는 못했다.

혹 기억나니,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을.
86년 봄이었지.
우리가 3학년 때, 학교 정문에서 우연히 마주 쳤을 때 서로를 보며 어색하게 그냥 웃었지.
그 만남이 이제까지 마지막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 미소가 이렇게 오랫동안 볼 수 없는 모습이란 걸 알았다면
그 자리서 그렇게 서운하게 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에 만나면 얘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그 후 학교에서 너를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넌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더구나.

반년이 지난 3학년 가을에 옆 호실에 놀러 갔다가 수군거리는 급우들의 말을 들으니,
우리학교에 다녔었던 동창이 큰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네 이름이 나왔어.
난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내 호실로 들어와 줄곤 네 생각을 하며 한없이 후회를 하였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았다.
제발 내가 잘못 들었기를 바랬었다. 다른 애들이라면 몰라도 너같이 순진하고 착한 아이가 그럴 수가!
머리를 가로저으며 부정을 하였지만 나중엔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처한 상황들은 네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벅찼고, 그것을 극복하기엔 네가 너무 여리고 순진했는지도 모르지.
감수성이 예민하고 여린 사춘기시절에 말이다.

꿈같은 학창시절에 너와 나는 그렇게 둠벙에서 맴도는 물매암이처럼 빙빙 돌기만 했었구나.
한 후배가 기숙사에서 농약을 먹고 자살을 한 소식을 들었을 때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내가 직접적으로는 알지는 못하는 후배지만 너무 마음이 아팠었다.
네 사건 소식을 듣던날 밤, 너에 대한 염려와 나의 처신에 대한 후회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친구야,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학창시절에 학업에 불성실했던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생활을 할 때
비로소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솟구치더구나.
대학에 다니고 싶어서 준비를 하였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원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그때 난 철저하게 깨달았다.
학생시절 학업에 불성실한 것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일 년 농사를 그르치면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이 년이 걸린다는 말처럼,
학창시절의 불성실한 학업을 보충하기 위해 나는 몇 겹의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고서,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0년만에 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87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97년에 독학학사학위를 학과 수석으로 취득할 수 있었다.

난 그저 한시름 놓은 느낌이었는데 어머니께서는 너무 기뻐하시더구나.
어머니의 가슴에는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담이 많이 있었나보다.
우리 부모님은 자녀들이 대학을 다니는데 실제적으로 학비를 보태주는 등의 도움은 주지 못했지만
마음인들 어디 그러고 싶지 않았겠는가!
남들처럼 자식들에게 대학공부를 시키고 싶었겠지만 그렇지 못해서 맘에 큰 시름이 되었던 것 같아.

○ ○ 야, 원망할거나 핑계하지 말자.
원망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더구나.
우린 학창시절에 시행착오를 했던 것 같다.
더 이상의 시행착오가 생기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자.
현실을 회피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그 상황 가운데 헤쳐 나갈 길을 모색하자.
괜히 다른 곳을 기웃거리다가 허방다리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
새장 속의 새는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끊임없이 날갯짓을 하며 나는 연습을 한다.
언젠가 조롱에서 해방되었을 때 자유로이 날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희망만은 움켜줘야 할 것이다.
매화는 씨를 고대하며 혹한 겨울을 이기고,
제비는 새끼의 보금자리를 기대하며 험난한 바다를 건넌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 그것은 '생명'이다.
이 세상의 한시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꿈꾸는 인생이다.
지금 우리를 옭아매는 현실이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님은 결코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희망'이란, 현실 속에 사는 우리가 미래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이다.

널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인상은 착하게만 보이는 여성스런 느낌과 수줍은 듯한 미소이다.
그 미소를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미소를 잃지 말길 바라며, 그 미소를 다시 볼 날을 기대하며 갈무리를 한다. 건강하여라.

팔년 팔월 팔일
법화산의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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