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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시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1. 10.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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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와 *

네가 오면
누리는 숨죽여.
소리 없는 너는
소리를 먹나봐!

땅을 뜰 때 넌
온기 가득 보듬고
가뭇없이 올랐어,
어른거리는 아지랑이처럼.
그러나 아무도 보지 않았지.
하긴 보려해도 보이지 않았어.
넌 그저 뿌연 물김일 뿐이었지!

하늘에 머문 넌
개미가 제 날개 떼듯
따스함을 내드리고
차가움에 오돌오돌 떨었지.
그러나 비움은 새로운 채움인가?
서로의 빈곳을 채우고자 껴안으니
이루 곱디고운 눈꽃송이 되었지!

땅에 올 때 넌
한기 듬뿍 머금고
하늘하늘 내렸어,
다소곳한 벚꽃처럼.
그러나 모두 널 볼 수밖에 없었어.
온누리가 때깔 바래 온통 희어졌으니.
넌 모든 시선 앗은 물꽃이 되었지!

고움이란 드러내는 게 아니라 드러나는 것,
네 모양이 고와.
참 고와.

- 미르해 첫눈 오던 날에 -


시작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끝은 시작으로 이어지고 시작은 끝이 없다.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뫼비우스의 띠'를 쉼없이 걷는 나그네, 결국 끝은 없고 시작만 있다.

우린 때때로 시작을 한다.
그 시작은 처음이다.
항상 애초이다.
아침에 떠오른 해는 오늘 내가 처음 대하는 해이고, 아침에 만나는 친구는 오늘 내가 처음 만나는 친구다.

* 처음이란 외로움인가?
애초가 아니라면 외롭지도 않을게다.
이미 누군가 닦은 길을 그저 뒤따르는 것은 함께 하기에 외롭지 않다. 그러나 함께 하여도 외로움은 있다. 이때는 '함께'라는 것이 오히려 그 외로움을 더욱 사무치게 한다. 때론 헌데 소금 뿌린 듯 자지러질 정도이다.
무리 속에서도 외로운 것은 자기의 길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금 걷고 있는, 아니 휩쓸려서 공부하고 일하고 꿈꾸는 것.
정말 자기가 원하는 길인가?
진짜 자기의 바라는 길인가?
짜장 자기에 꿈꾸는 길인가?
무리와 함께 길을 걷는 것은 어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움직여지는' 건지도 모른다. 단지 움직인다고 여길 뿐이지.

* 처음이란 외로움이 아니다!
혼자이기에 생긴 외로움은 혼자이므로 느낀 설렘에 묻히고 말지.
자신만의 길을 시작하는 것, 자신의 바라는 것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는 것은 김 안 나는 숭늉의 뜨거움이다.
이른 아침에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눈길을 혼자 걷는 숫눈밟이의 느낌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눈이 으깨지며 내지르는 소리를 발바닥으로 들으며, 눈동자가 감당하기엔 버거울 정도로 부신 눈을 눈꺼풀로 바라보며, 인간이 설레며 달에 첫발을 내딛듯 온통 새하얀 세상에 첫걸음을 떼는 것, 이 느꺼움은 더없는 기꺼움이다.
새로운 시작을 할 때는 오직 하늘만 보이고 사방이 막힌 깊은 허방다리 속에서도 외롭지 않다. 아니 외로울 겨를이 없다.

고등학생 때 꼴찌와 버금이던 내가 공장에 다니며 뒤늦게 늦깎이 공부를 시작하던 것, 또래들이 대학 졸업할 즈음에 난 대학공부를 시작하던 것, 친구들이 결혼하여 한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있는 지금에도 난 새로운 공부, 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그들과는 다른 나만의 시작이 있기 때문이다.
내 앞에 펼쳐진 숫눈길에서 첫발을 내딛으며 숫눈밟이를 한다. 내가 수놓은 흔적들은 어떤 모양일까? 그건 뒤로 제쳐두자. 오늘은 새로운 시작을 하는 날이다. 작년에 품었던 마음을 미쳐 이루지 못하고 올해 다시 품는다손 치더라도 지금의 내게는 새로운 마음일 뿐이다.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맘 다져먹고 신발 끈을 고쳐 맨다.
자, 시작이다.

-종이인형-


================= 토박이말 뜻풀이 ================
* 애초 :맨 처음.
* 짜장 : 과연. 정말로.
* 기꺼움 : 은근히 마음에 기쁜 느낌.
* 헌데 : 피부가 헐어서 상한 자리. 부스럼.
* 버금 : 여러 순위의 다음. 다음 되는 차례.
* 느꺼움 : 어떤 것이 마음에 겨워 북받치는 느낌.
* 숫눈밟이 : 내린 뒤 아무도 밟거나 더럽히지 않은 깨끗한 눈을 밟는 일.
* 허방다리 : 짐승을 잡으려고 땅을 판 위에 너스레를 친 장치. 함정(陷穽).
* 미르 : 용(龍)의 옛말. 새 즈문해(千年)는 '용의 해'이므로 '미르해'라 했다.
* 온누리 : '온'은 전체를 뜻하는 우리말이고, '누리'는 세상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 늦깎이 : 사리를 남보다 늦게 깨달은 사람. 나이 많아서 중이 된 사람. 과일 채소 등이 늦게 익는 것.
* 김 안 나는 숭늉이 더 뜨겁다.(속담) : 공연히 떠벌리는 사람보다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도리어 무섭다. 이 글에서는 비록 겉으론 요란스럽지 않더라도 속으론 설램과 기꺼움에 부글거리는 뜨거운 열정을 나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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