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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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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인형 꿈틀이 1999. 12. 31.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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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올해의 마지막 칼럼이네요.

옛 일기장을 뒤적이다가 입장권을 보았습니다. 죽서루, 불국사, 석굴암의 입장권이 세월을 잊은 채 뻔질뻔질한 꼴로 갈피에 드러누워 있더군요. 92년이 93년으로 바뀌는 즈음에 동해에 갔었습니다.

--- 서울발 삼척행 버스에 올랐다. 눈이 오길 기대 했으나 눈은 오지 않았다. 길가에 장승처럼 버티어 선 산등성에 전에 내린 눈이 있어 그나마 강원도엘 온 기분이 들었다. 길이 막혀 오도가도 못해도 좋으니 눈이 펑펑 내렸으면 했다. 어차피 서울을 벗어났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6시간의 버스 안에서 김성일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를 읽었다. 예전에 작가의 소설 '땅끝에서 오다'와 '땅끝으로 가다'를 읽었기에 작가가 낯설지는 않았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몇번이나 책을 덮었다가 다시 폈다.

7시에 삼척에 도착하여 죽서루 부근의 여인숙에서 잤다. 다음날 죽서루에 가니 동네 사람 몇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벼랑 위에 지어진 누각이 묘했다. 절벽 아래로 흐르는 오십천은 섬뜩하리만큼 새파랬다.
포항행 버스를 탔다. 등뼈처럼 쭉 이어진 도로는 바다를 늘 가까이에 두었다. 차안에서 바다를 보며 도중에 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먼바다는 파랗고 앞바다는 초록색인 것이 희한했다.

포항에서 구룡포로 갔다. 지도를 보면 동해의 해안선은 밋밋한데 구룡포가 뾰두라지처럼 불거져 있어 꼭 가보고 싶었다. 빨간 등대가 있는 방파제와 하얀 등대가 있는 방파제 사이로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방파제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과 불가사리, 군소, 따개비, 안개성게, 게소라 등을 잡았다. 바닷가의 아이들은 심심하지 않을 것 같다. 먼바다에서는 연신 흰 파도가 일렁거렸는데, 한 꼬마는 그 사연을 말해줬다. 동화 같은데 슬픈 사연이었다.

아이들이 삼각섬에 가자고 했다. 둘러봐도 섬은 없는데 그들은 날 끌고 방파제 끝으로 갔다.
그곳에는 삼각별 모양의 콘크리트 조각이 얼기설기 놓여 있었다. 이는 파도를 재우기 위해 일부러 공간을 둔 것인데 워낙 크기 때문에 아이들은 틈사이로 드나들며 놀았다. 아이들은 그곳을 삼각섬이라 불렀다.

1월 1일,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에 갔는데 기대보다는 못한 인상이 들었다. 토함산에 오르며 김노인을 만났다. 어르신은 일제시대에 영어를 잘 할 정도로 학식이 있는 분인데, 가끔 산을 찾는다는 거다. 어르신은 내게 '至樂은 莫女讀書'라는 공자의 말씀을 주셨다. 참 젊게 사시는 어르신이다. ---


* 세밑 해 *

1.
솔잎은 진줏빛 성에 끼어
쑥버무리마냥 뽀얗고
들녘은 우윳빛 안개 끼어
창호지마냥 뿌옇다

희뜩희뜩 까치 한 마리
은행나무 끄트머리에 앉아
꼬리깃털 까딱까딱 연신 키질

알곡은 안으로 쭉정이는 밖으로
행운일랑 안으로 불행일랑 밖으로

2.
떨구지 못한 떡갈잎
가지에 매달려 겨울 나고
이루지 못한 맘가짐
미련 안고 해 넘긴다

새봄
떡갈잎 둥치에 내려
거름되어 살찌우고

새해
맘가짐 재우쳐 다져
짙게 물든 옷감 되네

3.
서켠 하늘엔 달이 주춤주춤
동켠 하늘엔 해가 미적미적

시나브로 빛을 찾은 둥근해는
그 부심으로 이내 달을 가린다

지붕의 살얼음은 입김처럼 스러지고
측백나무 잎사귀에 물방울이 아롱다롱

볼 수 없지만 보이게 하고
만질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해

저 해(日)를 먹는다
또 해(年)를 먹는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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