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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인형 꿈틀이 2001. 1. 16.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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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리는 토요일 밤입니다.
친구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퇴근 후 적십자 병원에 갔습니다. 이 친구를 논산훈련소에서 만났는데, 처음엔 무척 싫어했었죠. 그 친구가 말을 할 때에 절반은 욕지거리였으니까요.
그 친구와는 각별한 인연입니다. 논산훈련소에서 부산으로 후반기교육을 받으러 가는 무리에도 같이 끼었고, 원주의 제 1군수지원사령부에도 같이 끼었고, 춘천의 82정비부대에도 같이 끼었고, 신동의 62정비중대에까지 같이 간 유일한 훈련소 동기가 되었습니다.

가장 힘든 훈련소시절과 졸병시절을 같이 보내며 우린 누구보다도 서로를 의지하며 챙겨주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욕조차도 정겹게 들리더군요. 고등학교를 나오자마자 터널을 뚫는 공사장에서 일을 하며 그는 자연스레 욕이 입에 배었다고 하더군요. 그의 욕지거리 속에 배인 진솔한 인간미가 정겨워 이제는 나도 그 친구와는 스스럼없이 욕지거리를 주고받으며 얘기를 하곤 합니다.

일주일 전에 그를 만났었는데,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상황 때문에 잔뜩 풀이 죽어있더군요. 그의 나쁜 상황들이 잘 풀리길 바랬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까지 당해 병원에 입원한 친구를 생각하니 맘이 무겁습니다.
친구가 하는 일은 아파트 공사 현장의 타워크래인을 설치하는 일인데, 매우 위험한 일이라서 가끔은 설치 중에 떨어져서 사람이 죽기도 합니다. 전에는 5층 높이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10층 높이에서 기기를 설치하던 중에 동료의 실수로 기계에 물려 왼팔의 근육과 뼈가 박살나버린 사고였습니다. 다행히 떨어지는 순간에 오른팔로 매달려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깁스를 하고있는 그의 초췌한 얼굴을 보며, 이 일은 너무 위험하니 앞으로는 다른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나는 말했습니다.
"이 일이 아니면 할 일이 없다. 내가 배운 일이 이 일이고 다른 일은 돈이 맞지 않아 할 수가 없다. 앞으로도 3년 정도는 이 일을 해야 한다."
이 말을 들은 나는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을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목숨을 담보로 일을 하는 그 친구에게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철야기도회가 있어 병원을 나와 교회로 갔습니다. 자정이 넘어 기도회가 끝나고 난 눈을 붙였는데, 잠결에 진아와 수진이의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여러 모양새의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진아는 강남의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옭아매는 올무로 여겨졌다고 하더군요. 일부러 삐딱하게 행동을 하여 아빠에게 많이 맞기도 했다는 겁니다.
진아의 아빠는 좋은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빗나가게 행동하는 딸을 이해하지 못했고, 진아 또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있었는데, 40평 아파트인 자기집은 화장실이 두 개 이지만 달동네의 판자촌에 사는 제 친구는 화장실을 가려면 한참을 걸어서 공동화장실로 가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진아 자신은 비록 가난을 겪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빛진 심정이 되어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좋은 환경을 마냥 누릴 수만은 없었다는 겁니다.

수진이는 도도하게 보일 정도로 예쁘고 잘난 아이인데, 강남의 좋은 학교와 좋은 아파트에서 생활할 때는 아픔이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수진은 그저 제 꿈만 꾸며 살았는데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어두운 현실을 맞닥뜨리고서 고통과 아픔을 알았다고 하였다. 잘 되던 아버지는 사업이 망해 지금은 겨우 지하 전세방에 다섯 식구가 살고, 그리고 수진이는 치료해도 나을 기미가 없어 몇 년째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수진이가 말하길 내가 이런 처지가 되니 오히려 인생을 좀 더 알게 되어 때론 감사를 드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교도소에 있는 친구와, 병원에 있는 친구와, 유학을 준비하는 친구와, 출산을 앞둔 친구와, 술에 찌든 아버지와, 그밖의 여러 모양새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기도를 하였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며 극복하길, 그리하여 성실한 삶을 꾸려나가길 바라며 말이죠.

-종이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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