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흙이 된 지렁이 8 (15)

글쓰기/소설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8. 8. 14:01

본문

목백일홍 시뻘겋게 활짝
말매미는 요란하게 맴맴
여름하늘 까마득히 높고
농삿꾼의 이맛살은 흠뻑

입추도 지난 여름,
아직 땅에서는 여름이 미적거리지만
하늘은 이미 높푸른 가을입니다.
시들부들 오갈든 수박잎처럼 풀죽은 몸을 이끌기가 버겁군요. 샘물이라도 벌꺽 들이켜야 힘이 솟으려나요?
-종이인형-
=======================================


8 (흙살림꾼의 변명)

도시에서 태어난 난 흙을 밟지 않고 생활했다. 놀이터에서 모래를 밟는 것이 그나마 흙과 접한 것이지만, 모래는 온전한 흙이라고 하기엔 뭔가 허전하다.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의 외삼촌댁에 놀려 갔었는데, 외사촌들이 뒤란의 장독대에서 소꿉놀이하는 것을 보았다. 사금파리랑 흙이랑 풀들을 가지고 놀이를 하는데, 난 처음엔 흙을 만지면 지저분해질까봐 주저하다가 사촌들이 너무 재밌게 노는 것이 부러워 끼었다. 엄만 내가 모래만 만져도 혼을 내셨는데, 흙은 지저분하다고 하셨다. 엄마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차가 쌩쌩 달리는 아파트 옆의 도로변 흙은 시꺼메 만지기가 꺼려졌다. 그러나 외삼촌댁에서 만져본 흙은 너무 부드럽고 촉촉하여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 같았다. 흙을 만지작거리며 사람 모양도 만들고 떡 모양도 만들며 놀았다. 손가락 사이로 삐져 나오는 흙이 마냥 신기로워 해 가는 줄 모르게 놀았던 기억이 새롭다.


엄만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해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당뇨병으로 고생하시다가 '결장직장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어릴 적부터 당뇨로 고생하시는 엄마를 지켜보며 매우 슬펐다. 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엄마처럼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치료하고 싶었다. 의대를 가기 위해 중학생 때부터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나름대로 백과사전을 찾아보고 의사에게 물어도 보았으나 당뇨병은 치료약이 없다는 것이다. 2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치료약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엄마를 살리려고 이것저것 살피다가 한가지 사실을 알았다. 당뇨를 비롯한 인간이 앓는 많은 병들이 음식과 관련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병이 음식으로 예방 및 치료가 가능 하다는 것도 알았다. 가령 암 같은 경우엔 토마토를 먹는 것이 매우 효과적인 예방책이라는 것이다.


의사는 당뇨병과 직장암에 걸린 엄마를 끝내 살리지 못했다. 엄마는 내가 의사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결국 눈을 감았다. 지금 내가 의사이더라도 어쩜 엄마의 병은 못 고쳤을 것이다.


엄마의 죽음은 내게 너무 큰 허탈감은 안겨주었다. 한동안 밥도 못 먹고누워 있었다. 나중엔 헛소리까지 했는데, 엄마를 잃은 슬픔과, 엄마를 살리지 못한 현대의학에 대한 실망과,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내 무능력에 한없이 시름에 젖었다. 난 엄마를 살리려고 의사가 되고자 했는데, 이젠 그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난 과학적인 현대의학을 포기하고, 비과학적이라고 여겨지는 농사를 짓기로 악물었다. 물론 농사를 해보기는커녕 시골에서 살아본 적도 없지만 객기를 부렸다. 아빤 내가 엄마 죽음의 충격 때문에 잠깐 그러리라 여겼지만, 실제로 난 농대에 들어갔다.


농대에 다니면서 농업도 매우 과학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졸업 후 주위에서는 대학원에 들어가 학자가 되라고 했지만, 난 내가 배운 지식을 가지고 실제 농사를 짓고 싶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농대를 졸업한 내가 농사를 짓겠다고 하자 국가는 싼 이자로 농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난 경험에 의존하는 농부들에게 과학적인 농사법을 알려 주기로 했다. 흙의 산도와 비옥도를 측정하여 정확한 석회와 양분을 주었고, 작물이 병에 걸리면 관찰하여 병원체에 따라 해당 약제를 정량으로 시약했다. 기계를 이용하여 노동의 효율성을 살렸고, 수확 후 관리를 체계적으로 하였다. 그렇게 농사를 지었는데도 결과는 내가 바라는대로 되지 않았다. 정량의 농약을 주면 벌레는 죽지않고 오히려 면역성만 길러졌고, 그래서 더 많은 농약을 뿌려야 했다. 비료도 정량으로 주었으나, 많은 양이 흙에 머물지 못하고 씻겨나가 더 많은 비료를 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럴까? 나는 연구를 하였다.


언제부턴가 어깨가 뻐근하고, 낮에는 졸립지만 밤이 되면 잘 수가 없었고, 마음이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눈이 몽롱해지고 때때로 가슴이 막히는 것 같아 가끔 깊은 한숨을 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처음엔 피로해서 그렇거니 했는데 아침에 양치질을 할 때 구토증이 심하다싶어 병원에 가니 '만성 농약 중독증'이라고 한다. 심해지면 간경화, 만성위염, 암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찔했다. 내가 농약중독이라니? 너무 어이없었다. 내가 어떻게 농사를 지었나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난 다수확이 목적이었다. 보다 많이 생산하기 위해서 갖가지 방법을 썼다. 조금이라도 병징이 나타나면 즉각 농약을 했고, 병이 발생하면 삼일 간격으로 뿌렸고, 출하하기 전에도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화학약품을 뿌렸다.


퍼뜻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다른 이들의 어머니를 죽이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왜 농사를 짓겠다고 했지? 엄마가 돌아가신 후, 먹거리의 가치를 알고 농군이 되겠다고 했지만 어떤 방법으로 먹거리를 생산하는지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구나. 난 첫마음을 잃고 살았던 것이다.
-계속-


반응형

'글쓰기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흙이 된 지렁이 9 (17)  (0) 2000.08.29
흙이 된 지렁이 8 (16)  (0) 2000.08.13
흙이 된 지렁이 7 (14)  (0) 2000.07.31
흙이 된 지렁이 7 (13)  (0) 2000.07.11
흙이 된 지렁이 6 (12)  (0) 2000.06.26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