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의 살림꾼 박종인입니다.
후텁지근한 여름밤, 혹 잠 못 이루고 계시나요?
동네 한바퀴를 돌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면 잘 잘 수 있답니다.
오늘 광화문의 정부중앙청사에서 공무원문예대전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글쓴이를 기껍게 다독거려 주신 모든 독자님 고맙습니다.
---------------------------
제 2572호
상 장
국 립 경 찰 대 학
농업서기 박 종 인
위 사람은 제 3회 공무원문예대전 수필부문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 하였으므로 이에 상장을
수여함
2000년 7월 31일
국 무 총 리 이 한 동
--------------------------------------
* 흙이 된 지렁이 7-2 *
"어떤 인간이 자연스러움을 가지고 있을까?"
슬기주머니가 꿈틀이를 향해 물었다.
"글쎄, 어린아이가 아닐까요?"
꿈틀이가 이렇게 대답을 하자 아까부터 고즈넉이 듣고있던 너나들이가 씰룩거리며 말참견을 하였다.
"천만에! 어린애는 너무 포악해."
너나들이는 어린애의 장난에 몸이 잘린 지렁이이다. 지렁이는 몸의 일부가 잘리면 다시 만들어지지만 절반이 잘리면 다시 재생되기 힘들어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행스럽게 이들은 두 동강 다 재생력이 왕성하여 완벽한 두 마리의 지렁이가 되었다. 둘은 서로가 자신의 살붙이임을 알기에 항상 붙어 다니므로 '너나들이'라고 불린다.
"꼬마는 흙을 헤집으며 흙장난을 하다가 나를 발견했는데 처음엔 뚱하니 살피더니 꿈틀거리는 내 움직임이 재미있는지 집적거렸어. 꼬마가 막대기로 몸을 건드릴 때마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나왔다. 너무 아파서 자지러지자 꼬마는 그런 꼴이 더 재미있는지 자꾸 해코지를 하였어. 결국 내 약한 몸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어. 붉은 피를 흘리며 심하게 움찔거리는 우릴 꼬마는 신기하듯 보았다. 그런 악동이의 눈에서 천진함이라곤 터럭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어. 그때 엄마가 꼬마를 데리고 갔기에 가까스로 살 수 있었지."
너나들이는 그때를 회상하며 괴로운 듯 한숨 한 모금을 쭉 내뿜었다.
"그럼, 꼬마의 엄마는 지렁이를 감싸는 맘을 가졌나보구나."
꿈틀이는 엄마가 꼬마를 데리고 가서 너나들이가 살았다는 말에 다행이라 여기며 물었다.
"그렇지 않아. 나에게서 꼬마를 떼어놓았던 그 엄마는 날 보더니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진저리를 쳤어. 꼬마의 엄마는 아이가 내게 해롭게 하는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아이에게 지저분할까봐 염려하는 것이었다. 날 똥 보듯 피했어. 난 인간이 너무 싫어. 왜 우릴 그렇게도 징그럽게 여기는지 몰라. 우리가 그들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도움을 주는데도 말이다."
너나들이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계속이었다.
"인간들은 겉모습만 가지고 평가하길 좋아하지. 특히 다리가 없이 기어다니는 동물은 매우 싫어해. 마치 신앙처럼 말이다. 난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아. 그들에겐 생명존중은 없어. 애들에겐 곤충이란 스스로 움직이는 신기한 장난감 정도이지. 그들은 생명에 대한 존중보다 자신의 흥미에 더 관심이 많아. 개미 100마리 죽이는 것도 흥미만 있다면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나중에 난 한가지 사실을 더 알았어. 어린아이들은 모방을 한다는 것이다. 즉 어른들의 생각과 행동과 습성을 닮아 간다는 것을, 어른들이 전쟁을 좋아하니 그것을 흉내내어 가짜 전쟁놀이를 하는 것이고, 어른들에게 생명존중이 없기에 애들도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이다.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어른이나 아이나 다 같지만 둘의 차이는 이렇다. 어른은 알면서도 저지르고 애들은 모르고 저지르는 것이다. 나는 애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른을 매우 싫어한다는 뜻이다."
잠잠히 듣고 있던 슬기주머니가 너나들이의 말을 받았다.
"인간들은 제멋대로야. 자기들이 만물의 영장이랍시고 맘대로 생물종을 선택하여 해충이라는 이유로 씨를 말리거나, 애완용이라는 이유로 모양과 습성을 바꿔버린다. 그것의 피해는 바로 질서 있게 연결된 자연의 연결고리를 끊는 꼴이다. 자연에는 순환이 있지. 물의 순환, 공기의 순환, 양분의 순환, 에너지의 순환, 이것은 '생명의 띠'이다. 생명의 띠는 소중한 것인데, 어느 한 생물만이 살자고 해서 다른 생물을 죽이는 것은 결국 생명의 띠가 끊어져 모두 죽게 되는 것이다."
꿈틀이는 저수지에서 물푸름이가 한 말을 생각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순환한다는, 즉 아래에서 위로도 흐른다는 말. 비록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물은 보이지는 않지만,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하는 보이지 않는 가치라는 것을.
슬기주머니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인간들은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자신들의 짓거리를 정당화시키는데 가령 빈대, 흰개미, 파리, 모기, 바퀴벌레 같은 생명체를 해충이라는 이유로 죽여야 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해. 그렇지 않으면 해충들이 금방 지구를 뒤덮어서 자신들이 살 수 없을 거라고 툴툴거린다. 이런 터무니없는 인간들에게 난 묻고 싶다. 왜 건강한 숲을 무절제로 파괴하며 드넓은 땅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으로 만드는가? 왜 스포츠란 이름으로 온갖 새와 물고기와 짐승들을 죽이는가? 왜 다른 사람들이 이룬 문화를 파괴하고 약탈하며 수천만 명을 죽이는가? 난 '해충'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뜻에서 보자면 인간이야말로 단연 으뜸가는 해충이 아닌가?"
"인간들이 왜 그런 짓을 하지?"
꿈틀이는 한때 자신이 닮고자했고 부러워했던, 인간의 그 미덥지 못한 행동을 듣고 놀래서 물었다. 흙지킴이가 입을 열었다.
"그건 곁눈질을 하느라 제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야. 하지만 인간다운 인간도 있어. 꿈틀아, 내일은 살가운 인간을 만나러 가자."
꿈틀이는 인간다운 인간이 있다는 말에 솔깃하여 물었다.
"그 인간다운 인간은 어디에 살죠?"
"산기슭에서 농사를 짓는 소탈한 농부이다. '흙살림꾼'인 그는 참농부이다. 내일이면 흙살림꾼이 이곳의 두엄을 밭으로 옮길 것이다. 두엄더미에 들어가 있으면 그 밭으로 갈 수 있어. 그곳에 가서 미더운 흙살림꾼이 어떻게 흙에 생명을 주는가 보거라."
꿈틀이는 자신이 찾고자 하는 슬기곶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처럼 느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