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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된 지렁이 6 (12)

글쓰기/소설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6. 26.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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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월요일, 촌뜨기의 시골집에도 주룩주룩 비가 내립니다.
살림꾼 박종인 비소식 전합니다.

도서관 뒤의 약수터에서 개구리의 개골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마 비룡지 아래 층층이 펼쳐진 논배미에서 개울을 타고 올라온 모양입니다.

적적함이 앙금처럼 가라앉은 이슥한 밤, 난데없이 나타난 악머구리(참개구리를 요란스럽게 잘 우는 개구리라는 뜻으로 이르는 말)는 그 악다구니를 소나기처럼 마구 퍼붓습니다. 밤은 금새 술렁이며 미꾸라지가 설쳐대는 도랑처럼 흐려집니다. 그 재잘거림이 내 귓바퀴에 부딪히지만 맘을 송두리째 빼앗을 정도는 아닙니다.
다정한 어깨동무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멍하니 서있는 내 어깨를 흔들 듯, 앙금처럼 가라앉은 내 마음을 일깨워 줍니다.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문둥이시인 한하운님의 '개구리'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 가

라랴 러려 로료
루류 르리 라


개구리가 개골거리는 까닭은 뭘까요?
짝을 부르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바동거림일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음에 발버둥치고, 또한 살아있음에 고함을 지르고, 때론 살아있음에 눈물을 흘립니다. 하찮은 지렁이도 살아있음에 밟으면 꿈틀거립니다.
오늘도 우리는 멈추지 않는 쳇바퀴 안에서 다람쥐처럼 쉼 없는 뜀박질을 합니다. 살아있음에,,,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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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두엄냄새가 점차 진하게 풍긴다. 이윽고 아빠가 살던 두엄더미의 밑에 도달한 꿈틀이는 고향에 온 것같이 들떴다. 다음날 두엄더미 주위를 살피느라 밖으로 나온 꿈틀이는 어제의 중얼이를 만났다. 꿈틀이는 반가운 맘에 알은체를 하였으나 중얼이는 마냥 중얼거릴 뿐 별다른 내색이 없다.

"어제 뭐라고 말했지? 다시 그 말을 해줄 수 있겠니?"

그러나 꿈틀이의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허튼소리만 더듬거린다. 중얼이에게는 어제의 말이 중요하지 않다. 그가 지껄이는 말은 빙빙 돌아가는 통속에서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요술공 같은 것이다. 꿈틀이는 가려운 마음을 시원스레 긁어 줄 말이 어제처럼 우연이 튀어나오길 기대하며 얼마의 간격을 두고 따라갔다.

밭 귀퉁이의 아름드리 서어나무에는 박새 한 마리가 둥지를 틀고 있다. 그는 중얼이가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부리로 쪼아 이리저리 흔들어댄다. 중얼이는 붉은 피를 흘리며 두 동강이 났어도 계속 중얼거린다.

"개미는 개미이고, 지렁이는 지렁이다."

배고픈 개 설쳐대듯 토실토실한 중얼이를 잡아먹은 박새는 만족하며 부리를 땅에 비벼대더니, 잠시 후 토악질을 하며 금방 잡아먹은 중얼이를 게워냈다. 이어 눈이 뒤집어지고 날개를 퍼덕이더니 죽어갔다.

그 박새는 우연히 '죽음의 밭' 두둑에 있는 서어나무에서 깃털을 다듬다가 농약에 중독되어 밖으로 기어 나오는 지렁이를 발견하였다. 그는 힘들게 멀리 날 것 없이 서어나무에서 농약 먹은 지렁이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는 얕은꾀를 내어 아예 둥지를 틀었다.
지렁이는 농약을 분해하는 능력이 있지만 너무 많은 농약은 다 분해하지 못해 지렁이 몸에 잔류된다. 박새는 생물농축에 의해 시나브로 농약중독이 된 것이다.

'지렁이는 지렁이다!'라는 중얼이의 마지막 말을 들은 꿈틀이는 복잡하게 얽힌 실뭉치의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
그는 가장 지렁이다운 삶이 어떤 것일까 골똘히 생각하다 '슬기주머니'를 만났다. 슬기주머니는 많은 경험과 슬기로 좋은 충고와 바라지를 하는 어르신 지렁이이다.

"지렁이다움이 뭐죠?"
꿈틀이는 한 가닥 기대를 걸고 물었다. 슬기주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인간 흉내를 내던 지렁이가 있었어. 양식장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을 인간인 양 착각하여 곁눈질만 하므로 '곁눈질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시답잖은 꼬락서니가 참 눈꼴사나웠다."

슬기주머니의 말에 꿈틀이는 뜨끔했다. 예전에 매미가 누구냐고 물을 때 자신을 인간이라고 거짓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곁눈질이는 인간의 법칙을 가지고 저 아래의 쓰레기장을 자신의 땅이라고 우겼어. 우리는 황당했으나 내버려두기로 했어. 우리에겐 땅을 혼자서 독차지한다는 개념이 없었으나, 인간에게 소유라는 개념을 배워온 곁눈질이는 소유욕에 눈이 멀어 지렁이다운 삶을 버렸다. 난 그에게 확실히 밝혔다. 우린 네 소유라고 주장하는 쓰레기장엔 들어가지 않겠다. 대신 너도 우리 모두의 소유인 쓰레기장 밖으로는 나오지 마라. 그러자 시건방진 곁눈질이는 대뜸 그러겠다고 했어. 제 딴에는 쓰레기장에는 영양분이 풍부하므로 굳이 다른 곳으로 갈 일이 없을 거라고 여긴 거야."

꿈틀이는 고치 속에서 어렴풋이 들었던 흙의 소리, '땅을 독점하거나 파괴하는 자는 결코 그 대가를 피하지 못하리라.'를 떠올렸다.
슬기주머니는 계속 얘기했다.

"달포정도 지났을 무렵 곁눈질이는 흉측한 병에 걸려 죽었다."
"병이라뇨?"

꿈틀이는 병이라는 말에 의아하여 물었다. 병에 대한 얘기는 이제껏 듣지 못했으므로 솔깃했다.

"<단백질중독증>인데, 환대가 부어오르고 몸이 희게 변해 마디가 잘리면서 죽는다. 우리의 식도에서는 탄산석회가 분비되어 산성흙을 중화시키는데, 계속 강한 산성흙만 먹으면 미처 중화시키지 못해 박테리아의 작용이 강하게 일어나 단백질증후현상으로 소낭과 사낭이 파멸되는 복막염으로 죽는다.
"......."

"꿈틀아, 지렁이다움이 뭐냐고 물었지? 그것은 곁눈질하지 않고 올곧게 보는 것이 아닐까? 올곧게 본다는 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야. 보여지는 것과 바라보는 것은 다르다."

꿈틀이는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귀기울이며 듣는다. 보여지는 것과 바라보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꿈틀아, 보여지는 별을 보는 이는 밤하늘에 많은 별들이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다고 여기지만, 별을 바라보는 이는 별들의 모양과 움직임을 살피며 여러 가지를 예측한다. 곁눈질하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어정쩡한 것이 되고 만다."

꿈틀이는 곁눈질이가 죽은 그 쓰레기장이 어떻게 되었나 궁금하여 물었다.

"슬기주머니, 쓰레기장은 더 이상 지렁이가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었나요?"
"아니, 오히려 아주 좋은 곳이 되었어. 쓰레기장의 음식쓰레기, 휴지, 동물의 똥 등은 영양가 높은 우리의 밥이다. 쓰레기장이 한 마리의 지렁이에게는 '버거움'이지만, 많은 지렁이에게는 '기꺼움'이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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