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연 하늘, 텁텁한 기운이 가득한 날에 시골뜨기 글 올립니다.
경찰대학 내에 '어린이 교통교육장'이 있는데, 주변의 유치원에서 매일 수백명의 아이들이 견학을 옵니다.
대운동장 군데군데에 아이가 이불에 오줌을 싼 양 얼룩이 지며 잔디가 시들어 가기에 정오 무렵에 잔디밭 안의 스프링클러를 설치했습니다. 분수처럼 세찬 물줄기가 하늘로 퍼지는 모습이 보기에 참 시원합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대운동장에 가보니 운동장 안에 설치된 두 개의 스프링클러 주위에 아이들이 와글와글, 유치원 꼬마들이 웃옷을 벗고 물방울을 맞으며 마냥 깔깔거리며 놀고 있었습니다.
내가 호스를 끌며 물을 뿌리자 그 아이들은 어느새 내 주변에 모여들더니 물줄기를 안으며 좋아했습니다. 난 잔디에 물을 주는데 잔디처럼 파릇파릇한 꼬마들이 그 물을 다 받습니다. 어느새 백여명의 아이들에게 둘러쌓인 나는 그들의 요구대로 물을 뿌려주었습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즐거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옷이 몽땅 젖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원한 물줄기에 흠뻑 젖어 깔깔거리는 아이들이 얼마나 귀엽든지요.
난 오늘 잔디에 물을 주었습니다.
난 오늘 잔디처럼 파란 아이들에게 물을 주었습니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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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숲을 지나던 꿈틀이는 무섭게 생긴 병정개미를 만났다. 까만 갑옷과 날쌘 몸매, 날카로운 이가 섬뜩하여 바짝 긴장을 하였다.
"어이, 혼자만 다니는 지렁이야. 어디를 가니!"
병정개미는 꿈틀이를 해코지할 생각은 없지만 으스대고 싶었다.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그는 지나가는 곤충들을 붙잡고 군소리를 곧잘 한다.
"지렁이가 많이 살고있다는 두엄더미를 찾아가는데...."
주눅들어 옹색한 대답을 하자 병정개미는 깔깔거린다.
"너희들은 혼자 생활하는 버러지들인데 왜 다른 지렁이를 찾지?"
나무라듯 말하는 병정개미가 싫었으나 애써 참았다. 병정개미는 조직생활이 가장 우수한 삶의 방법이라고 뻐기며 다닌다.
"지렁이야! 너희들은 자기만 챙기지? 우리는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산다. 우리 몸에는 보통 위(胃) 말고도 사회위가 하나 더 있는데, 허기진 동료를 만나면 입을 맞대고 사회위에 들어있는 양분을 건네준다. 이래서 우린 곤충의 으뜸이 되었다."
직수굿한 꿈틀이는 개미가 커 보인 만큼 자신이 작게 보였다. 그러나 조직생활에 대한 자랑을 떠버리는 병정개미는 정작 조직에서 이탈된 외톨이다. 조직생활은 잘하나 홀로서기는 영 서툰 그는 처량한 제 꼬락서니를 감추기 위해 너스레를 떨었는데, 순진한 꿈틀이는 그 말을 곧이듣고 시무룩해졌다. 병정개미는 우쭐하여 계속 허풍을 친다.
"꿈틀아, 난 조직의 중요한 일 때문에 지금 가야 해. 다음에 다시 조직생활에 대해 말해 줄게. 조직에 대해 배우면 넌 지렁이 세계에서 영웅이 될 거야."
병정개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쭈뼛거리며 떠난다. 허풍이 상대에게 먹혀들어 갈수록 그의 너스레는 늘어만 갔다.
개미는 꽁지에서 개미산(길잡이페로몬)을 뿌리고 다니므로 멀리 나가서도 다시 집으로 찾아 올 수 있다. 병정개미는 지네를 만나 조직생활에 대해 자랑을 하다가 비가 오는 통에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왜 우리는 개미처럼 조직을 이루지 못할까?' 직수굿한 꿈틀이는 한참을 머물러 고민하는데 '중얼이'라는 지렁이가 다가온다.
".....숲은 숲이다."
".....지렁이는 흔들리는 나뭇잎과 같다. 그러나 생각하는 이파리이다."
".....지렁이는 흙에서 만들어 졌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중얼이는 연신 그럴듯한 말들을 구시렁거린다. 꿈틀이는 다시 자신의 고민에 빠져든다. 병정개미가 자랑삼아 지껄인 몇 마디의 말이 꿈틀이의 가슴에서는 폭풍처럼 소용돌이친다.
'우리도 조직생활을 하면 강해질까? 이것이 내가 찾고자 하는 삶의 의미인지도 몰라.' 남의 말을 가슴에 고이 품으면 시나브로 자신의 말이 되어버리고, 나름대로 이끌어낸 결론은 점차 확고한 자신의 신념으로 굳어진다.
".....나무는 자신이 왜 그곳에 심겨져 있는지 불만을 하지 않는다.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비가 오는 대로, 햇빛이 비추는 대로, 다소곳이 순응하며 받아들인다."
중얼이는 중얼대고 꿈틀이는 꿈틀대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마치 중얼이가 진지하게 말하고 꿈틀이는 신중하게 듣는 것처럼 보인다.
중얼이는 꿈틀이의 아빠가 태어나고 죽었던 '죽음의 밭'에 살던 지렁이인데, 그곳은 농약에 오염되어 많은 지렁이가 죽거나 기형이 되었다. 지렁이는 농약을 분해하는 능력이 있어 오염된 흙을 먹고 배설하면 정화되는데, 심하게 오염된 곳에서는 지렁이도 죽게 된다. 꿈틀이 아빠는 '죽음의 밭'을 살리려고 일부러 그곳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죽었고, 중얼이는 신경세포에 이상이 생겨 싱거운 소리를 하며 떠돌게 되었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꿈틀이는 중얼이를 덜떨어진 지렁이로 여겼다.
중얼이는 생각하는 기능이 망가진 대신 기억하는 기능은 더 발달하여 예전에 들었던 말들을 생각 없이 떠버리는 버릇이 생겼다.
".....조직을 이룰 때에 가장 개미답고, 혼자 생활할 때 가장 지렁이답다."
꿈틀이는 골똘히 생각하느라 중얼이의 소리는커녕 그 존재마저 느끼지 못했다. 중얼이는 한참을 더 떠버리다가 다른 곳으로 갔다.
".....개미는 개미이고, 지렁이는 지렁이다."
중얼이가 사라지는 것도 모르던 꿈틀이는 퍼뜩 생각난 듯, '뭐라고 말했지?' 하고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중얼이는 이미 저만치 가고 없다. 중얼이의 마지막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돈다. 뭐라고 했더라! 손바닥을 긁어도 가려운 곳을 찾지 못해 갑갑하듯 꿈틀이는 안절부절못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