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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 닮은 시골마을 고샅

농사일/농업&농촌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5. 3. 28.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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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 닮은 시골마을 고샅
내 삶의 나이테에 그려진 고향동네 골목 풍경
  박종인(boshing) 기자
해가 땅에 묻히고 뭇별이 하늘에 싹틀 즈음, 옆집 멍멍이가 괜스레 짖어대면 건넛마을의 검둥이도 덩달아 짖어댄다. 마치 산 위의 봉수군이 불을 피우며 적군이 밀려옴을 전달하듯 개들은 밤 소식을 전한다. 땅거미는 뒷산 등성마루에서부터 미끄러지며 마을을 덮쳐 보 쌓은 둑에 냇물 차듯 고샅에 켜켜이 쌓여간다.

하늘에 제를 올리듯 지붕 위로 솟은 굴뚝에서 연기가 어슬렁거리며 피어오르면 하루를 마친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한다. 밥상을 물리면 어른들은 얘기꽃을 피우기 위해 집을 나서 사랑채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아이들은 어둠을 핑계 삼아 색다른 재미를 맛보려고 골목을 기웃거린다. 은근슬쩍 달이라도 비친 날이면 골목을 누비는 아이들의 밤놀이는 더욱 길어지게 마련이다. 이것이 내 어릴 적의 시골동네의 골목 풍경이다.

그때는 동네의 골목은 세상의 전부였고, 골목 안에서 모든 것이 다 통했다. 더 멀리, 더 넓은 세상이 필요 없었다. 골목길 담벼락에서 딱지치기하여 따먹은 지저분한 딱지가 돈보다도 더 소중했고, 골목 한구석에서 땅뺏기 하여 차지한 두세 발짝의 자리가 땅보다도 더 듬직했다. 씨앗껍질 안의 싹이 장차 큰 나무의 가능성이듯 동네가 세계의 전부인 꼬마들에겐 마을 속의 골목이 큰 세상의 본보기였다. 골목대장은 세상을 지배하는 왕이고, 골목의 규칙은 꼬마들 세상의 법이었다.

소라게가 점차 자라면서 껍데기를 바꿔 새 집을 삼듯이 꼬마가 소년이 되면 마을보다 큰 학교를 다니게 된다. 마을 앞 안산을 에도는 마을길을 벗어나면 한길이 나타난다. 한길은 골목길과 감히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반듯하다. 한길을 통해 학교를 가고 장터를 가고 도회지로 간다. 하지만 한길은 집들이 있는 마을로 빠르게 오가는 통로일 뿐 느긋하게 거닐며 이웃을 살피거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심장에서 나온 피가 대동맥과 소동맥을 거쳐 그물맥 같은 실핏줄에서 혈관을 벗어나 조직 사이를 누비며 비로소 산소와 양분을 내놓고 이산화탄소와 노폐물을 거두듯 사람들은 골목에서 절을 나누고 정을 쌓으며 생활을 품앗이한다. 시골동네의 고샅길은 한길 같은 대동맥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주고받는 인간생활의 관계를 이어주는 모세혈관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고샅은 마을사람의 삶과 이야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골목에는 오가며 만나는 사람들의 인사말과, 객지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고대하는 마음과, 정든 임의 집을 기웃거리며 서성이는 연인의 애틋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새로 마을에 들어오는 이삿짐도 골목길로 들어오고, 함진아비의 실랑이도 골목에서 벌어진다.

늦게까지 자습하다 어두워진 후에 혼자 학교를 나서 집으로 향하는 길은 괜스레 예전에 들었던 무서운 이야기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길가의 야산에는 뭔가가 숨어서 나를 노리는 것 같아 머뭇거리다가도, 뒤에서 도깨비가 날 잡으려고 쫓아오는 것 같아 부리나케 달리면서 겨우겨우 마을에 도착하여 골목길에 접어들면 무섬은 금방 사라진다. 골목에 들어선 순간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혹 깡패나 도깨비가 나타나더라도 소리만 지르면 아는 형과 이웃 아저씨가 금방 달려올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도시를 만들 때 산은 깎고 골은 메워 터를 평평하게 하고, 길은 네모로 죽죽 그어 그야말로 바둑판 모양새이다. 시골의 자연부락은 대개 비스듬한 터에 그대로 자리하고 골목의 선은 부드럽다. 시골마을의 모양은 마치 아름드리나무 같다. 밑둥치는 마을 어귀이고, 굵직한 원가지와 가느다란 잔가지는 마을의 골목길이다.

처음엔 한 줄기 묘목이던 것이 자라면서 두세 가지의 1차 가지가 생기고, 1차 가지에서 다시 서너 가지의 2차 가지가 생기며 햇빛과 바람 등을 고려하여 나무의 모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골마을도 나무의 모양처럼 지형과 방향과 우물의 위치 등에 따라 집들이 자리하고 고샅이 생겼다.

지금은 인위적인 환경이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며 마을의 골목도 인위적으로 바뀌어간다. 규격화된 상품이 관리상의 편리성이 크듯 규격화된 마을도 생활의 편리는 클 것이다. 그런데 왠지 예전의 구불구불한 자연부락 골목이 그립다.

예전엔 물길을 따라 길이 나고 마을이 생겨났다. 문득 '물 흐르듯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막히면 돌아간다. 시골마을은 물 흐르듯 자연스레 구성되었다. 마을의 집들은 같은 방향으로 자리하고 골목은 도랑처럼 구불하다. 도시의 집(아파트)이 같은 단지 내에서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지어지고 길은 굴곡 없이 반듯이 뚫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사는 곳에 따라 사람의 성품도 변하는가보다. 같은 방향을 보며 사는 시골사람들은 두레나 울력 등을 통해 뜻과 힘을 모아 마을일을 공동으로 처리하지만 각각 다른 방향을 보며 사는 아파트의 주민들은 생각도 각각이라 좀체 뜻을 모으기 어렵다. 그런데 지금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적잖은 사람들이 예전에는 시골에 살던 사람들이다.

나도 지금 아파트에 산다. 명절이면 시골을 찾지만 내가 찾는 고샅의 풍경의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들의 노는 소리는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었고, 들일을 나서는 힘찬 농부의 발길 대신 지팡이를 짚는 노인의 지친 발길만 남았다.

마을 앞 안산에서 고향마을을 바라보니 가을나무 꼴이다. 여름날의 무성한 잎사귀 대신 빛바랜 몇몇의 나뭇잎만 나뭇가지에 겨우 매달려 있는 풍경이다. 사람이 있어야 생기가 있고 문화가 있는데, 지금 시골에는 생기가 사라지고 전통의 문화마저 맥이 끊어지고 있다.

마을 골목에 들어선다. 지금은 낯선 풍경이지만 예전의 낯익은 풍경을 떠올린다. 담벼락에 남아 있는 낙서와 허물어진 흙담과 부러진 당산나무, 이들은 내 유년의 추억으로 인생의 나이테에 그려져 있는 것들이다.

돌이켜 볼 수 있는 것은 체험한 것이 있어야 가능하다. 변화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하며, 내 안에 그려진 나이테를 통해 그나마 유년의 골목을 돌이켜 볼 수 있어 다행이다.
* 고샅: 촌락의 좁은 골목길. 고샅길.

* 땅뺏기: 정한 땅을 말을 튕겨 금을 그으면서 뺏어 나가거나, 가위바위보를 하여 이긴 사람이 한 뼘씩 땅을 재어 자기 땅으로 하는 어린이의 놀이. 땅따먹기. 땅재먹기.

* 울력: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 하거나 이루는 일. 또는 그 힘.

* 한길: 사람이나 차가 많이 다니는 큰길.

* 함진아비: 혼인 때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보내는 함을 지고 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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