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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멧돼지의 선물

글쓰기/글쓰기(2020)

by 종이인형 꿈틀이 2020. 4. 18.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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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의 선물

멧돼지가 뒷마당까지 다녀갔다. 그들이 다녀간 흔적은 아무렇게나 삽질한 듯 너저분한 구덩이로 남았다. 딱히 먹을 것이 없어 보이는 뒤뜰 바닥을 왜 후벼 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다녀간 흔적은 그들이 지금 이 부근 어딘가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했다. 오싹했다. 구덩이를 보고 이내 고갤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들이 다녀갔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은 졸아들었다.

 

산자락의 언덕빼기집 뒤는 바로 산이다. 그 뒷산은 다른 산으로 첩첩 이어졌다. 산 중턱에 자리한 산장은 육지를 침범한 바다의 만처럼 산허리 위로 높이 올라간 곳에 들어섰다. 뒤뿐만 아니라 양 옆도 산이다. 길이 있어 사람이 다니긴 하지만, 거긴 사람 사는 마을이 아닌 짐승 사는 산골이다. 그러기에 산새가 노닥거리고 멧돼지가 달음박질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당연하다. 그러기에 멧돼지가 뒷마당을 다녀갔다고 해서 새삼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놀랐다. 당황스러웠다. 이제껏 그들이 오지 않았을 뿐 못 올 곳은 아니었으며, 이제는 그들이 지나가다 들르는 곳이 된 것이다. 나는 그걸 이제 안 것이다.

 

뒷산에 올라가보니 내가 낸 산길 말고 다른 길들도 몇 갈래 생겼다. 그 길은 멧돼지길이다. 그들이 수시로 집 뒤를 지나다닌다는 거다. 그 길 주변에는 곰보처럼 파헤친 자국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폭탄을 맞은 듯 흙이 들춰져있다. 내가 삽질을 한다면 하나 파고 지쳐서 포기할만한 구덩이들이다. 구덩이를 살펴보니 멧돼지들이 뭔가를 찾기 위해 땅을 판 듯하다. 아마 땅속에 있는 먹거리를 찾기 위해 팠을 것이다.

 

멧돼지는 내가 뒷산에 틈틈이 심어놓은 각종 꽃들도 파헤쳤다. 그걸 보니 속이 영 불편하다. 화풀이라도 하고 싶지만 멧돼지는 보이지 않고, 막상 나타난다면 화풀이는커녕 도망가기에 급급하겠지만 속상한 건 감출 수 없다. 멧돼지가 여기저기 흙을 후볐지만 내가 심은 꽃을 일부러 판 것은 아닌 듯하다. 뭔가 싶어 파봤을 수도 있고, 다른 것을 파면서 꽃들이 파헤쳐졌을 수도 있다. 그들이 이 산에서 흙을 파서 건질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칡일 것이다. 구덩이에는 칡넝쿨이 보인 경우가 많았다. 칡은 그들이 먹을 만한 것이다.

 

나도 칡을 좋아하지만 칡뿌리를 캐기 위해 삽질할 자신이 없다. 무릎 깊이 이상 흙을 파서 뿌리를 캐내야 하는데 비탈진 산에서 돌 섞인 흙을 삽질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기에 산에서 칡을 보더라도 캘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칡이 옆의 나무를 옭죄어 죽이므로 톱으로 칡덩굴을 자르기는 한다.

 

제법 큰 흙더미가 보였다. 다가가보니 흙더미만큼 구덩이도 컸다. 멧돼지 몸통이 잠길만한 크기다. 까만 산흙과 돌덩이가 널브러진 모습은 도굴꾼이 다녀간 듯 너저분했다. 낙엽 덮인 산비탈에 퇴비처럼 쌓인 흙더미는 누군가가 뭔가를 묻으려다 만든 것처럼 섬뜩하게 여겨지는 한편 뭔가가 그 안에 있을 것 같은 호기심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 안에는 뭔가가 있었다. 희부연 터럭 뭉치가 보였다. 사람의 머리칼은 아니었다. 훨씬 굵고 짧았다. 짐승의 털인 듯. 멧돼지털이겠지. 이 구덩이를 멧돼지가 팠을 테니. 멧돼지가 아니고서는 이 산중에서 이렇게 깊게 구덩이를 파헤칠 짐승은 없을 것이다.

 

역시나 칡이다. 칡넝쿨이 꽈배기처럼 꼬여 옆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그네뛰기해도 될 만큼 굵직한 칡넝쿨을 따라 내가가니 구덩이에 칡뿌리가 있다. 칡뿌리가 드러난 채 그대로 있다. 칡줄기 밑둥치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칡뿌리는 한 자 떨어진 곳에서 다시 뿌리를 내어 자랐다. 그 뿌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밑둥치에서 양 쪽으로 내 팔만큼 길게 파헤쳐져 있다. 칡의 뿌리는 이보다 훨씬 길다. 아직 땅 속에 얼마나 박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드러난 부분만 해도 내 양팔 길이다. 가장 굵직한 부분이다. 뿌리의 한쪽은 너절하게 잘렸다. 나머지 한 쪽은 땅속에 박혀 있다. 잡아당겼다. 힘껏 당기니 땅속의 뿌리가 끊겼다. 난 힘 한번 쓰고 팔뚝만한 칡을 두 덩이 캐냈다. 땅을 파지 않고도 칡을 캔 것이다. 심봤다 라고 외칠 판이다. 심봤다 대신 칡봤다 라고 해야 맞겠구나.

 

멧돼지는 힘겹게 구덩이를 팠을 것이다. 쇠도 아닌 맨살인 주둥이와 앞발로 이 큰 구덩이를 파는 것이 쉽진 않았을 것이다. 밑둥치부터 시작하여 땅속으로 뻗어나가는 뿌리를 따라 양쪽으로 크게 구덩이를 팠고, 석 자나 되는 칡뿌리가 드러나도록 흙을 걷어냈다. 먹기만 하면 된 상태다. 근데 그대로 두었다. 왜 그대로 두었는지는 모르겠다. 칡을 캐고 있는 데 더 힘 센 누군가가 다가왔는지, 혹은 나중에 와서 먹으려고 키핑 했는지도 모르겠다.

 

난 생각했다. 이건 멧돼지가 내게 준 선물이라고. 내 산장의 뒤뜰을 파헤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인지, 내 산을 지나다니는 것에 대한 통행세인지는 모르지만 멧돼지의 그 마음을 기꺼이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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