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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심을 때는 언제?

글쓰기/글쓰기(2020)

by 종이인형 꿈틀이 2020. 6. 1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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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심는 때는 언제?

 

 

이제 막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중년 사내는 동네 할머니께 물었다.

“할머니, 콩은 언제 심어요?”

머리에 희끗희끗 서리 앉은 사내는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교수였으니 묻기보다는 가르치는 게 몸에 뱄지만 시골에서의 농사일에는 도통 꺼벙이다. 마을 곳곳을 눈 감고도 다닐 정도로 길이 밝은 토박이가 서울 오면 눈 뜬 봉사이듯, 도시 대학의 학생들 앞에서 막힘없이 가르치던 교수도 시골 농장의 작물 앞에선 갈피를 못 잡는 초짜일 뿐이다.

자신의 강의를 열심히 받아 적는 학생을 기특하게 여기던 사내는 자신도 준비된 학생처럼 보이려고 달력에 날짜를 표기할 자세로 할머니 말에 귀 기울였다.

“올콩은 감꽃 필 때 심고, 메주콩은 감꽃 질 때 심는 거여.”

할머니의 대답이었다. 뭔가를 적으려던 손은 줄 끊어진 연처럼 맥이 풀렸다. 뭔 소릴까? 몇 월 며칠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민들레 갓털 날리 듯 대충 내던진 할머니의 답변에 사내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래, 맞다! 문뜩 정신 차린 사내는 인정했다. 비과학적인 할머니의 대답이, 적어도 그곳에서는 가장 과학적인 대답이라고.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윤구병 교수님이 부안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며 겪은 이야기다. 그곳 마을에는 곳곳에 감나무가 있다. 감나무는 해에 따라서 꽃 피는 시기가 당겨지기도 하고 늦춰지기도 한다. 그해의 온도와 강수량 등 기상에 따라 고무줄처럼 탄력적으로 자라는 것이다. 그 날짜는 디지털처럼 딱 떨어지는 숫자가 아니고 아날로그처럼 두리뭉실해 보이지만 감꽃이 피는 것은 합리적인 과학이다.

 

‘농사는 때를 아는 것이 상책이다. 때를 가볍게 여기거나 거스르는 것은 하책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의 말이다. 서유구는 중국의 백과사전인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 ‘자라는 것을 보고 자랄 것을 심고, 죽는 것을 보고 죽은 것을 수확한다.’ 라는 글귀를 보고 농사는 때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풀달력 이라는 말을 그의 저서인 『행포지』와 『임원경제지』에 적었다.

풀달력은 해당 지역에서 푸나무가 싹트고 꽃피고 시드는 것을 보고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데 활용하는 농사력이다. 같은 나라에서도 아랫녘과 윗녘의 기온이 다르고, 같은 위도에서도 평야지와 산간지의 기온이 다르기에 한 나무의 꽃이라도 피는 때가 다르듯이 작물의 때도 다른 것이다. 풀달력의 내용은 이런 것들이다.

 

‘씀바귀가 살 오르고 큰냉이가 싹틀 때에 봄보리나 대마를 심는다.’

‘창포잎을 보고 밭갈이를 시작한다.’

‘들국화가 시들고 울타리 박을 탈 때에는 벼를 베어 쌓아야 한다.’

 

그 사람을 알고 싶으면 그의 친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지역의 작물은 그 지역의 식물을 통해 알 수 있다. 양지바른 곳의 찔레꽃이 일찍 피듯 그곳에는 참깨를 일찍 심을 수 있으며, 거름진 곳의 풀이 무성하듯 그곳에서는 옥수수가 잘 자란다.

물론 풀달력과 농사속담 중에는 지금과 어울리지 않는 내용도 많다. 가령 ‘7~8월 제비가 논가운데 앉으면 풍년든다.’ 이 속담은 제비는 해충을 잡아먹는 익조로 논에서 해충을 많이 잡아 먹어야 농사가 잘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논에서는커녕 집 주변에서도 제비를 보기 드물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제비집이 흔했지만 지금은 희한스레 드물다.

‘콩밭은 소가 뜯어야 소출이 많이 난다.’ 콩은 끝순을 치면 곁의 새순이 나와서 더 많은 가지를 내므로 소출이 는다. 꼴을 먹이려고 소를 들에 매두었을 때 소가 인근 콩밭의 콩잎을 뜯어먹으면 자연스레 순지르기를 하는 꼴이 된다는 뜻이다. 지금은 예전처럼 소를 들에 매놓고 꼴을 먹이지 않으니 맞지 않는 말이다. 굳이 지금으로 변경하자면 콩밭은 고라니가 뜯어야 소출이 많이 난다라고나 해야 할까? 하지만 고라니 지나간 곳의 콩밭은 소출이 떨어지는 게 현실이다.

콩 심는 때와 관련한 속담으로 ‘조팝나무 꽃필 때 콩 심어야 한다.’ 또는 ‘복숭아꽃이 질 때 콩을 심는다.’ 가 있는데 지금 때와는 맞지 않는다. 내가 있는 중부지방인 이천에서는 조팝나무 꽃 필 때와 복숭아꽃 질 때는 4월 중순인데, 메주콩인 대원콩 심기의 알맞은 때는 망종과 하지 사이인 6월 중순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다. 옛 농사속담이 틀렸다고 탓할 것 없이 지금에 맞게 새롭게 만들면 된다. 각 지역의 사람들이 자기 지역에 알맞은 풀달력을 새로이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다시 윤구병 농사꾼이 있는 부안으로 가보자. 전북 부안은 따뜻한 곳이다. 감나무가 마을 곳곳에 있으므로 언제 감꽃이 피고 지는지 오며가며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감꽃 보고 콩 심을 때를 가늠할 수 있다.

한데 내가 있는 중부지방에는 감나무가 드물다. 감나무는 추위에 약하므로 우리 지역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 당연히 눈에 덜 띈다. 그럼 뭘 맞대고 견줘야 할까? 둘러보니 밤나무가 눈에 띈다. 밤나무는 마을 곳곳과 야산 여기저기에 심겨져 있다. 밤꽃은 모양이 화려한 건 아니지만 꽃향기가 진해서 너도나도 꽃핀 것을 알아챌 수 있다.

꿩 대신 닭이듯, 감 대신 밤이다. 경기도에서 지금 다시 쓰는 풀달력에는 ‘올콩은 밤꽃 필 때 심고, 메주콩은 밤꽃 한창일 때 심는다.’라고 적어야겠다. 6월 중순인 지금, 들이쉬는 숨결에 밤꽃향 그윽하다. 콩씨뿌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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