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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차

글쓰기/수필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8. 12. 2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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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벙어리 차

우리는 상황에 따라 말하고 고함을 질려야 한다.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학생들의 선생님으로서, 성도들의 목자로서, 시민의 대표로서 올곧은 소리를 해야 할 것이다. 가브리엘의 말을 믿지 않아 벙어리가 되어버린 사가랴처럼 되지 않도록 용감하게 표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내 차가 말을 잃었다. 앞 차가 갑자기 서도, 옆 차가 끼어들어도 도통 짖질 않는다. 차가 말을 하지 않으니 때론 내가 차문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며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 접어드는데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학원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골골거리는 내 차는 결코 사뿐히 다가가는 것이 아니지만, 아이들은 자기네들끼리 떠드느라 내 차가 다가가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길을 내주지 않았다. 운전석의 차창을 내리고 아이들에게 비켜달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니, 성질 급한 뒤 차가 빽빽거려서 아이들을 흩트렸다.

내 차가 군자라서 고함을 지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목 쉰 거위처럼 목소리가 잠기기 시작하더니 아예 소리를 읽어버렸다. 경음기가 고장난 것이다. 올 봄에도 경음기가 고장나서 새로 갈았었는데 또 망가진 것이다. 차가 만들어진 지 14년이 되다보니 잔병치레를 하곤 한다. 이참에 침묵기도 하듯 침묵운전이나 해 볼 요량으로 그대로 차를 몰고 다녔다.

세상은 너무 시끄럽다. 특히 차가 많은 도로는 오리떼를 풀어 놓은 양 시끌벅적거린다. 앞 차가 조금만 머뭇거려도 빽, 옆 차가 끼어들려 해도 빽, 큰 차는 더 큰소리로 위협하며 고함을 지른다. 운전을 하다보면 집단심리에 홀리는가 보다! 너도나도 필요 이상 경음기를 눌러댄다. 한국인의 조급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운전문화의 단면이다.

경음기가 고장난 차를 몰고다니다 보니 방어운전을 하게 된다. 앞차와의 간격을 유지하고, 신호등이 바뀔 때 무리한 시도를 하지 않게 된다. 벙어리 차를 몰고 다니며 말을 못하는 청각장애우의 불편함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다. 달포 가량 그렇게 벙어리 차를 운전하다가 정비소에 가서 경음기를 고쳤다. 잠깐은 경음기가 고장난 차를 몰아보는 것도 괜찮겠지만 계속 그 상태로 운전하는 것은 불편하고 위험하다. 수리가 불가능하다면 모를까 간단히 정비할 수 있는 경음기는 제대로 수리하여 운행을 해야 한다. 수술하면 말할 수 있는 벙어리가 수술을 마다해선 안 되듯 말이다.

말 많은 세상인데 정작 말없는 사람들이 있다. 주위에 귀기울여보니 사람들이 모여서 남의 흉보는 소리와 상사에게 알랑방귀를 꾸는 소리는 요란한데 입바른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직장생활에서는 동료의 부정을 의리라는 이유로 입 다물고, 경제의 전망자들은 사회불안을 이유로 분석자료를 고스란히 발표하지 못하고, 종교지도자들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 라고 말하길 꺼려하고 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말하고 고함을 질려야 한다.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학생들의 선생님으로서, 성도들의 목자로서, 시민의 대표로서 올곧은 소리를 해야 할 것이다. 가브리엘의 말을 믿지 않아 벙어리가 되어버린 사가랴처럼 되지 않도록 자신의 신념을 믿고 용감하게 표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지간하면 앞 차가 미적거리고 옆 차가 새치기를 하더라도 경음기를 울리지 않겠지만, 안전운행을 못하는 차에게는 경음기를 울려 위험을 알리도록 하겠다. 마찬가지로 내 위치에서의 할 소리는 하고자 한다. 난 꿀 먹은 벙어리가 아니지 않은가?


글 : 박종인 객원기자
2008.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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