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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달밤의 기도

글쓰기/수필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8. 9. 1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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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달밤의 기도

달빛은 은근하고 마음은 차분하다. 지금처럼 선선한 가을밤이면 절로 기도가 나온다. 굳이 시인의 시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가을에는 홀로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다. 오도카니 서서 달을 본다. 달에 그려지는 한 얼굴, 그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눈다. 귀뚜라미는 곁에서 잔잔히 연주하고.
가을이다. 달은 점점 배가 불러오고, 한가위는 한발 한발 다가선다.

불이 없어 어두운 밤이 무서웠던 그 옛날, 달은 밤길의 길라잡이이자 어깨동무였다. 낮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던 마을 앞 숲정이의 오솔길이 밤이 되면 상상 속의 온갖 잡귀들의 소굴로 여겨진다.

인기척이 없는 그 길을 머뭇거리다 접어들면, 숲 속의 새보다도 더 겁쟁이가 되어 나뭇가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그러다가 구름 속에 묻혔던 달이 방그레 나타나며 무섬증은 앙금처럼 스르르 가라앉고, 상상 속의 잡귀들도 나무와 바위의 본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아무 빛도 없는 깜깜한 그믐밤, 그 무서운 밤이 나에게서 사라졌다. 더불어 시골 소년의 순진한 꿈도 사라졌다. 깜깜한 밤은 지독히 매운 고추장이다. 뜨겁지만, 마시면 시원한 숭늉처럼 중독이다.

아이들은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무서운 이야기를 하면 이불을 뒤집어쓰며 겁을 내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를 숨죽이며 듣는다. 깜깜한 밤이 무섭지만 그래도 밤은 깜깜한 게 제 맛이다. 옆 친구의 숨소리는 들려도 얼굴은 보이지 않을 정도의 그 짙은 어둠이 그립다.


현대의, 도시의 달빛이 부실하다. 있으나마나한 보름달, 달의 존재를 거의 잊고 산다. 달보다 더 밝은 것들이 우리의 눈에서 달빛을 앗아갔다. 달은 길가의 가로등, 자동차 전조등, 간판의 네온등에 밀려 꾸어다 논 보릿자루일 뿐이다. 이제 밤은 어둡지 않고, 달은 밝지 않다.

까만 밤, 달빛은 은근하고 마음은 차분하다. 지금처럼 선선한 가을밤이면 절로 기도가 나온다. 굳이 시인의 시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가을에는 홀로 기도하기 좋은 계절이다. 오도카니 서서 달을 본다. 달에 그려지는 한 얼굴, 그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눈다. 귀뚜라미는 곁에서 잔잔히 연주하고.


글 : 박종인 객원기자
2008.09.12
사랑의교회>갓피아 사랑이야기>세대공감 크리스천>희로애락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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