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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序詩)

글쓰기/시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5. 28.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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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개가 내려와 흙에 스미는 흙의 날, 칼럼살림꾼 인사 올립니다.

오늘은 칼럼집 앞마당을 깨끔하게 빗질하고 새 멍석을 깔았습니다. 이제껏 제 토담집(시골뜨기의 잠꼬대) 마당에서는 주로 제가 가꾼 글 낟알을 멍석 위에 펼치곤 했는데, 이따금은 또 하나의 멍석을 깔고 남의 알찬 글 낟알도 곁들이고자 합니다.

경찰대학 도서관 3층 자유열람실,
양파의 표피세포처럼 격자문 꼴의 책상들이 나란히 들어앉아 있는데, 그 중의 한 자리는 내 둥지입니다. 어스름이 내리면 숲의 새가 제 둥지로 돌아와 지친 깃을 접듯, 일과를 마치는 해거름이면 도서관의 책상머리에 앉아 정신을 모읍니다.

내 자리는 칸막이가 되어있고, 내가 만들어 단 형광등도 있고, 옆의 책꽂이에는 20권 남짓의 책들이 있습니다. 각종 사전, 영어, 한국사, 생물학, 재배학 등등의 책들이 꼿꼿이 꽂힌 틈바구니에서 시집을 끄집어내 펼쳤습니다.

좋은 시는 물리지 않는 시가 아닐까요?
이 시를 질릴 만큼 자주 접했는데도 대할 때마다 치솟는 느꺼움은 샘물처럼 알싸하고 청명함입니다.



서시(序詩)
- 윤 동 주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동주는 고민 후에 시를 지었고, 종인은 시를 읽은 후에 고민합니다.
그러하기에 감히 끄트머리로부터 거슬러 풀어보고자 합니다.

1941년 11월 20일, 그 밤에 별을 스치던 바람은 2000년 5월의 이 밤에도 여전히 붑니다. 주어진 길을 걷는 것은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 죽어가는 것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죽음이라는 테두리에 에둘린 나, 그리고 내 곁의 고만고만한 사람들.
우리는 구린내 나는 똥을 싸고, 역겨운 입내 풀풀 풍기며, 목덜미에선 까만 때가 덕지덕지 밀립니다. 우리 몸이 이러하듯, 맘 또한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이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해오라기(백로)처럼 해맑다기보다는 까치 배때기처럼 희떠운 까닭일 것입니다.
시인은 흠 없는 살았다고 뻐기며 우쭐대는 것이 아니고, 부끄럼 없는 삶을 꾸리고자 아등바등 몸부림치며 이 시를 지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인의 자기 살핌이 참 아름답습니다.

-종이인형-


======== 토박이말 풀이 ========
* 곁들이다 : 한 자리에 덧붙여 어울리다. 곁에서 거들어 주다.
* 낟알 : 껍질을 벗기지 아니한 곡식의 알.
* 남짓하다 : (무게·분량·수효 따위가) 어떤 한도에서 조금 남음이 있다.
* 는개 : 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
* 멍석 : 흔히 곡식을 너는 데 쓰는, 짚으로 결어 만든 큰 자리.
* 물리다 : 싫증이 나다.
* 아등바등 : 몹시 악지스럽게 자꾸 애를 쓰거나 우겨대는 모양.
* 어스름 : 어스레한 상태. 또는, 그러한 때.
* 토담집 : 흙으로 쌓아 만든 담 위에 지붕을 덮어 지은 집.
* 해거름 :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무렵. 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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