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개를 기르며 (3-3)

글쓰기/수필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10. 12. 00:49

본문


촌뜨기 박종인입니다.

삐진 꼬마처럼 잔뜩 울상을 짓던 하늘은 간간이 눈물을 흩뿌리고 말았습니다.
이 비는 아직 덜 여문 가을을 무르익게 할 것입니다.
들녘마다 흥겨운 풍년가가 들리는듯 하죠?
우리 생에도 풍성함이 함께 하길 원합니다.
=======================================


3. 눈높이가 다른 이와 상대하기

대학교수와 유치원생이, 꺽다리와 앉은뱅이가, 일반인과 귀머거리가 서로 만나서 얘기를 주고받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말대꾸를 해야할까?

감자탕이나 뼈다귀해장국을 먹으면 아줌마에게 남은 뼈다귀를 싸달라고 해서 검둥이에게 주는데,
나도 솔찬히 뼈다귀해장국을 좋아하지만 검둥이는 허천나게 좋아한다.
뼈다귀 하나를 주면 날름 받아먹고 다시 입맛을 다시며 날 쳐다보지만
한꺼번에 왕창 주면 땅을 파서 묻어놓고 다음에 캐 먹곤 했다.

여름이 다가오면 더위를 식히고자 빙과를 자주 사먹는데, 검둥이는 날 빤히 쳐다보며 군침을 흘린다.
가끔은 내 눈길을 끄느라 컹컹거리며 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검둥이는 내가 먹는 거라면 뭐든지 얻어먹으려 하는데,
심지어는 껌도 받아먹다가 아무리 씹어도 계속 그 모양이라 도로 뱉어내었다.

이것이 개와 인간의 다른점이 아닌가싶다.
유희적 인간은 심심풀이로 놀이와 기호음식을 만들었다.
담배를 피우거나 껌을 씹는 인간들의 모습이 개의 눈에는 한심하게 보여질지도 모른다.

젖먹이가 보채듯 낑낑거리며 꼬리를 살랑거리는 검둥이에게 절반 남은 빙과를 주었다.
개는 아이스크림을 혀로 날름 핥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집 옆에 땅을 팠다.

아뿔싸!
검둥이는 뼈다귀를 묻듯이 아이스크림을 구덩이에 넣더니 흙을 덮고 앞발로 톡톡 다지는 게 아닌가!
뿌듯한 듯 날 쳐다보는 검둥이를 보며,
난 '그게 아닌데'를 연신 중얼거리며 어찌할 바 몰라했다.
그러나 검둥이에게 아이스크림이 녹는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으니 그저 우두커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빙과가 너무 맛있어서 두고두고 아껴먹을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지금은 배가 부르기 때문에 다음에 먹을 요량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 있어서의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나는 부자연스럽게 바라보았다.

한참 후, 검둥이는 그 빙과가 생각나는지 묻었던 곳을 팠다.
달랑 손잡이만 남은 빙과를 보고 의아해하던 검둥이의 표정이 얼마나 웃기던지!
깔깔거리는 날 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꼬리를 치더니 다시 사방을 더듬거리며 아득바득 땅을 후볐다.
그런 검둥이의 몸짓이 무척 우스꽝스러웠으나 비웃기엔 그의 발버둥이 너무나 진지했다.

개와 말을 할 수 있다면 일의 자초지정을 설명하련만,
내가 개가 아니고 개 또한 사람이 아니니 바이 어찌하랴!
차라리 개가되어 컹컹 짖고싶은 생각마저 일었다.
만약에 눈높이가 달라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했다.

대학교수는 아이들의 말투로 유치원생과 말해야 할 것이며,
꺽다리는 앉음새로 앉은뱅이와 눈을 맞춰야 할 것이고,
일반인은 손짓으로써 귀머거리와 말길을 터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는 대학강의를 이해할 수 없고,
앉은뱅이는 일어설 수 없고, 귀머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는 할 수 없지만 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비록 내게 고달픔이 따르더라도 기꺼이 낮아지는 모습은 참으로 정겹다. ♣

-종이인형-



======= 토박이말 풀이 ========
* 가늠 : 목표나 기준에 맞고 안 맞음을 헤아려 보는 일.
* 가스러지다 : 잔털 같은 것이 좀 거칠게 일어나다.
* 끝막음 : 일의 끝을 내어 완전히 맺음. 종결(終結).
* 달포 : 한 달 이상이 되는 동안. 달소수. '날포'는 하루, '해포'는 일년이 좀 지난 동안.
* 돌쩌귀 : 문짝을 여닫게 하는 두 짝의 쇠붙이. 경첩. 지도리.
* 동트기 : 동쪽 하늘이 밝기 시작할 때.
* 띠앗머리 : 형제 자매 사이의 우애하는 정의(情誼). 의초.
* 말대꾸 : 남의 말에 제 의견을 말하는 일.
* 망석중이 : 팔·다리에 줄을 매어 당기고 늦추어 춤추게 하는 나무로 만든 꼭두각시.
* 바이 : 다른 도리 없이 전연. 아주.
* 부상(扶桑) : 해가 뜨는 동쪽 바다 속에 있다고 한 상상의 신성한 나무. 또, 그 나무가 있는 곳.
* 뻐기다 : 잘난 체하고 으쓱거리며 뽐내다.
* 솔찬히 : 정도가 상당하다.
* 앉음새 : 앉거나 앉아 있는 모양새. 앉음앉음.
* 투그리다 : (짐승들이) 싸우려고 으르대며 잔뜩 노리다.
* 피붙이 : 같은 핏줄을 가진 겨레붙이. 종족.
* 함지(咸池) : 해가 진다고 하는 큰 못.
* 허울 : 생긴 겉모양. 실속이 없는 겉치레.
* 허천나다 : 걸신(乞神)들리다. 몹시 먹으려고 하다.
* 해코지 : 남을 해하고자 하는 짓.





반응형

'글쓰기 >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빛에 대한 갖은 생각 버무르기  (0) 2000.10.18
글벗 (4)  (0) 2000.10.14
개를 기르며 (3-2)  (0) 2000.10.11
개를 기르며 (3-1)  (0) 2000.10.11
처서  (0) 2000.10.11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