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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기르며 (3-2)

글쓰기/수필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10. 11.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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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렁이의 죽음.

두 달 정도 되었을 때 누렁이가 시름시름 앓았다.
며칠 그러다가 일어나겠지 생각했는데 도무지 나아질 낌새가 없었다.
누렁이는 고꾸라진 채 밥 먹을 기운조차 없이 누워있었다.
부랴부랴 가축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약을 먹이고 주사도 맞혔지만 상태는 더 심각해졌다.

토요일 퇴근하는 무렵에 누렁이를 살펴보니, 죽은 양 꿈쩍도 않고 누워있었다.
그제까지만 해도 인기척이 있으면 버겁게 고개라도 들었었는데, 이젠 머리 들 기운조차 없나보다.
두 손으로 몸뚱이를 받쳐드니, 일주일동안 굶어서 무척 야위었고, 다리와 고개는 문어 마냥 축 쳐졌다.
초롱하던 눈은 개개풀렸고 번들거리던 코는 거칠해졌고 야드드한 털은 가스러진, 그야말로 산송장이었다.
눈앞에서 한 생명이 죽어가는데도 손을 쓰지 못하니 맘이 쓰라리었다.
차라리 나를 떠나도 좋으니 살기만 하라고 넋두리하며 목을 옭아 맨 목걸이를 풀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데 눈곱 낀 누렁이의 쾡한 눈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병도 병이지만 기력이 딸려 죽을 것 같아 포도당주사라도 놓은 요량으로 학교로 들어갔다.

보이지가 않았다. 어제 눕혀놓았던 그 자리에 누렁이가 없었다.
순간, 누렁이가 다시 힘을 찾아 움직였구나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사무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도 누렁이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누가 치우기 전에는 사라질 리가 없는데 누렁이의 행방을 아무도 몰랐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달포 후, 검둥이와 함께 동트기에 산책을 나갔다.
개꼬리 마냥 휘어진 논두렁을 따라 파릇파릇 돋아나는 풀을 밟으며,
마치 이슬을 흠뻑 머금은 들풀처럼, 봄날의 싱그러운 기운에 젖어 걸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폴딱거리는 검둥이는 나랑 나들이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삐죽 튀어나온 코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거나 앞발로 흙을 파기도 했다.

사무실 아래의 산자락에 이르렀을 때,
검둥이는 길가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를 찾은 듯 날 오라고 몸짓을 했다.
난 뼈다귀가 있으려니 여기며 다가갔는데 그곳에는 달포 전 모습 그대로 누렁이가 잠들어있었다.
삼월이라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스산하고,
그곳은 그늘진 곳이라 낮에도 날이 풀리지 않아 눈 외에는 부패되지 않고 깨끗한 모습으로 굳어 있었다.
낙엽을 걷고 땅을 파서 고이 묻어주었다.

그 아픈 몸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죽기 전 안간힘을 다해 죽을 자리를 찾았던 누렁이를 생각하니 놀랍기도 하고 경이로웠다.
죽을 때가되면 제 무덤을 찾아간다는 코끼리의 얘기는 들었지만 개의 경우는 듣지 못했다.
자기의 추한 주검을 주인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결벽증인지,
집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마지막 눈을 감는 것이 개의 본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기의 죽을 때를 알고 죽을 자리를 찾은 개를 보며 곰곰이 생각을 하였다.


인생은 매일 죽음을 맞닥뜨리는 '러시안 룰렛'이다.
태양이 지구를 돌 듯 회전식 연발권총의 실린더가 시나브로 돌고,
태양이 함지(咸池)에 빠지는 순간 방아쇠는 당겨진다.
다행이 죽지 않았다면 다음날 태양이 부상(扶桑)에서 부상(浮上)할 때 노리쇠는 다시 뒤로 당겨지고,
실린더는 한 칸 돌며 새로운 사격을 대기한다.

단 하나의 총알이 실린더의 어느 구멍에 있는지는 귀신도 모른다.
사람의 평균수명을 60세라고 가정하면 확률은 대략 1/22,000이다.
죽음의 때가 어떤 이는 빠르고 어떤 이는 더디기도 하겠지만,
실린더가 한 칸씩 돌 때마다 죽을 확률은 점점 커진다.

매일 죽을 각오로 삶을 맞이하는 사람은 결코 생을 가벼이 여기지도,
가이없이 여기기도, 부담스럽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개가 먹이통의 바닥을 샅샅이 핥듯 삶을 알뜰살뜰하게 꾸려나갈 것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뻐기다가 갑자기 닥친 죽음을 앞두고 허둥지둥하기보다는
겸허한 맘으로 오늘을 허락하신 신께 감사하며 하루를 맞이한다면,
내일 아니 당장 오늘 죽더라도 차분하게 삶을 끝막음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수많은 날들 중에 '단지' 하루가 아니라,
평생에 한번밖에 없는 '오직' 하루이다.
내 삶에 있어 1999년 8월 15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오늘'에만 있는 날이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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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안 룰렛
회전식 연발 권총에 총알을 한 발만 넣고, 총알의 위치를 알 수 없도록 탄창을 돌린 뒤,
몇 사람이 차례로 자기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목숨을 거는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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