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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수필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10. 6.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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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종인 오빠.

녹음이 짙어가는 속에 푸른 나무와 무성한 저 숲이 실은 하나의 이파리라는 것을,,,,,
제각기 돋았다 홀로 져야 하는 하나의 나뭇잎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펜을 듭니다.

쾌청한 날씨라 그런지 시험에 대한 '공포' 보다도 '여름방학'에 대한 기대가 앞섭니다.
그래서인지, 덕현이의 동물의 소리를 연상케하는 '사의 찬미' 아닌 현대판 '사회 찬미'가 기분 좋게 들립니다.

지금 오빠의 기분이 어떤지 궁금하네요.
사람들은 정말 이상해요.
불행을 같이 느낄 수 있지만, 행복은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없는 것 같아요.
불행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사람들은 덩달아 침울해 집니다.
그러나 행복한 사람이 옆에 있다고 해서 곁의 사람들도 모두 다 즐거워지지는 않죠.
도리어 그 반대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불행을 예수는 도리어 행복이라고 가르쳤죠.
역설을 알았던 예수는 그만큼 현실주의자였을까요?
여하간에 오랜만에 저는 기분이 좋거든요.
오빠도 기분 좋은 날만 계속 되셨으면 좋겠네요.

저는 아무리 여름의 특권이 '소나기와 젊음'이라지만
그래도 태양이 내리쬐는 환한 날이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무척 행복합니다.

그런데, 내 친구 '퍼스트 페이퍼'는
"태양은 모조보석, 햇빛 속에선 밤처럼 생명의 깊이를 이해할 수 없어."
라며 모처럼 그럴듯한 역설을 내세우는 거 있죠.
어쨌거나 오늘도 변함없이 바쁘게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걱정이 되요.
바쁜 꿀벌들에겐 슬픔이 없다지 않아요?
역이용하면 바쁜 인간에게도 슬픔이 없다는 소린데,
바쁜 꿀벌에겐 슬픔이, 아니 슬픔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철학도 없으니까요.

언제나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도 휴머니즘을 잃지 않기를 바라면서 생활해야 하겠죠.
도시의 녹음처럼 말입니다.
무성한 저 숲의 나뭇잎은 죽지 않아요.
기억처럼 언제고 남아있을 뿐이죠.
나뭇잎처럼 푸르르게 보내시는 칠월이 되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짙어가는 교정의 녹음을 바라보며 ―.
옥이가.
89. 7. 7.



****************

아마 그때가 처음 부산엘 갔을겁니다. 아니 경상도에 처음 갔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양 다리처럼 이 나라를 버티고 바다에 서 있는 한 몸인데 그리 멀었던가?

결국 내 의지대로가 아닌 매인 몸이 되어 얼떨결에 갔습니다.
논산훈련소에서 밤기차를 타고 떠났는데, 도착하니 부산진역 이었습니다.
바닷가의 비린내도 나는 것 같고 큰 도시의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산자락에 자리한 '육군기술병과학교'에서 12주의 후반기교육을 받으며 이등병시절을 보냈습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가물치를 꺼내면 팔딱거리듯,
생각지 않고 지냈던 이 주소가 눈앞에 드러난 지금 팔딱거립니다.

우. 612-061
부산시 해운대구 반여 1동 사서함 1호 학생단 사병 2중대 7내무반 <36>
이병 박종인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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