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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맞이 (2-2)

글쓰기/수필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9. 22. 18:32

본문

-이어서-


3. 북한강에서

- 정태춘 작사/작곡 -

저 어둔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짙은 안개 속으로 새벽강이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릴 들으려 했오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 때
우리 이젠 새벽강을 보러 떠나요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으로 신선한 새벽이 있소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


박 속 마냥 고운 이의 나니미야.
봄날의 처녀인 양 설레는 마음으로 첫휴가를 기다렸었다.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난 처음으로 물안개를 보았어.
한겨울 어머니가 대야에 미지근한 물을 퍼주면 대야의 수면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듯, 강에서는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강이 끓고 있는 걸까?
생전 처음 보는 이 신기하고 황홀한 풍경을 단선의 경춘선을 따라 덜컥거리며 달리는 기차 안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면에서 피어오른 물안개는 일정 높이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오르지 않고 켜켜이 쌓여 안개층을 이루었다. 흐린 날 굴뚝의 연기가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마을 위에 낮게 깔리 듯 안개구름이 강물 위에 있어 강물과 같이 유유히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형용키 어려운 감격이었다.
북한강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보았는가!

며칠 전 '북한강에서'를 입으로 흥얼거리며 북한강과 나란히 나있는 경춘로를 따라 청평댐을 지나고 의암댐을 지나고 호숫가를 지나고 춘천댐을 지나고 612중대가 있는 심포리를 지나 삼거리 검문소에서 화천방향으로 조금 가다가 계성리로 접어들었다.


4. 까만 밤하늘, 하얀 수정별

밤하늘은 까맣다.
밤하늘은 까맣다!
밤하늘은 까맣다?
으레 밤하늘은 까맣다고 여긴다. 그러나 정말 까만가?

이곳 용인의 숲에서 올려다 본 하늘도 어슴푸레한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도시의 밤하늘을 어찌 까만 하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면과 맞다은 하늘은 희뿌연하고, 한가운데 하늘은 어정쩡한 군청색이다. 까만 밤하늘을 볼 수 있는 장소는 매우 드물구나.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헤는 밤, 시인 동주는 말한다.
가을 속의 별을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기 때문이라고,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라고, 그리고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별 헤는 밤, 촌놈 종인은 말한다.
가을 속의 별을 다 "안 헤는 것"은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도 아니고, 내일 밤이 남은 까닭도 아니고, 아침이 쉬이 오기 때문도 아니라고.

주변머리 없는 사람은 듬성듬성 남아있는 정수리의 머리카락을 애면글면 세며 지키고 싶은 맘 애절하다. 주변하늘의 별은 이미 사라졌고 가운데하늘의 애오라지 남아있는 별도 사라지는 지금, 자꾸만 빠지는 머리칼을 애지중지 여기듯 사라지는 별을 부여잡고 싶은 맘 간절하다.

불면증에 걸린 도시에서 밤하늘의 별을 헤는 것은 버스 안의 사람을 헤는 것보다 더 쉽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가 별인 것만은 아니다. 반짝이는 것 중에는 인공위성도 있고 비행기도 있다. 지구와 가까이 있어서 그나마 또렷한 개밥바라기를 비롯하여 밤하늘의 별을 헤기 위해서는 단지 두 손의 손가락만으로도 충분히 셈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것이 가을 속의 별을 다 "안 헤는 까닭"이다.

'환경 호르몬'은 남성의 정자를 감소시켜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고,
'환경 오염'은 하늘의 별을 감소시켜 지구의 존속을 위협한다.

초등학생 시절 '탐구 생활'을 보니, 은하수는 '우유를 뿌려 놓은 듯 하늘을 가로지르는 뿌연 강' 같다고 적혀있었는데, 난 그 설명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때 시골에서 바라본 은하수는 우유를 뿌려 놓은 듯한 뿌연 강이 아니라, 보석을 뿌린 듯이 또렷한 별무리가 촘촘히 박혔었다. 그러나 도시로 이사와서 바라보니, 정말 은하수는 우유를 뿌려 놓은 양 희미한 모양이었다. 지금은 아예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아! 미리내를 보고 싶다.
어린 시절, 넘실거리는 미리내의 뭇별 중에 내 별이 있다고 여겼었는데, 지금은 그 미리내가 보이지 않으니 내 별도 사라져 버린 건가?
별은 동경이요, 꿈이요, 희망이요, 사랑인데 .


5. 샛별눈을 가진 아가

맘이 도타운 나니미야.
그곳 계성리의 저녁은 땅거미가 지자마자 이내 어두컴컴해졌다. 마당에서 병철형이랑 용상이랑 사라랑 세살배기 하민이랑 별빛 아래에서 식사를 하였지. 낯선 나를 살피는 강한 시선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총총한 수정별들이 날 빤히 굽어보고 있더구나.

밤하늘은 별들의 소곤거림으로 고요한 소란이 일고있었다. '고요한 소란'이란 말에 의아하겠지. 그 넓은 밤하늘에 빽빽이 들어차는 그 많은 별들을 본 순간 난 저들이 서로 부대끼며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소란스러울 줄 알았지. 인간들이 모이면 언제나 소란스럽듯이 말이야.
그런데 밤하늘은 소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너무나 고요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적막하고 까만 밤하늘을 대하니 마음이 술렁이었다. 서울에서는 자정이 넘어도 고요하고 까만 밤하늘을 기대하기 어려운데 강원도에서는 어스름이 내리자마자 하늘엔 이내 새까만 '멍석'을 깔리고, 그 위에 새하얀 '쌀알'이 널리었다.
차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람들의 소란은 없고 오직 풀벌레 소리와 돌돌돌 흐르는 많은 맑은 물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갓 태어난 병철형의 둘째 아기 하경이는 새록새록 잠자고 있었다.

샛별눈을 가진 아가야,
너는 잠결에 개울의 물소리를 듣는다. 배짱이, 귀뚜라미 소리도 듣는다. 닭울녘에는 우렁찬 수탉의 소리도 듣는다. 아침이면 뒷산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한낮에 두렁밭에서 쟁기질하는 누렁소의 음메 소리도 듣는다.
넌 이 소리를 들으며 자랄 것이다. 이 소리들에 길들여진 너는 '세상의 소리는 이런 소리구나!'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여기길 바란다. 그리하여 네가 지치고 힘들 때, 이 소리들을 들으며 엄마의 품속에 있는 것인 양 편안함을 느끼길 바란다.

칭얼거리며 보채던 아기가 엄마 품에 안기면 아늑한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들었던 익숙한 엄마의 심장소리가 아가를 편안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소리에 익숙해져서 네가 이 소리를 들으면서 엄마의 품에 안긴 것처럼 아늑함을 느끼길 바란다.

너는 달포가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서 빛을 구별하고 형체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네 눈동자에는 푸른산이 박히고 맑은 냇가가 박히고 영롱한 별들이 박힐 것이다.

새들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물을 자신의 어미로 알고 졸졸 따라 다닌다. 새끼오리가 처음 보는 사물을 어미로 인식하는 것은 "각인"인데 넌 밤하늘의 별을 네 눈망울에 각인 하여라. 별과 눈맞춤 하여라. 영롱히 빛나는 별처럼 네 눈이 초롱초롱 반짝일 것이다. 그 맑은 눈으로 사람들을 보아라. 푸른 산, 푸른 강을 보며 그것들을 네 눈에 또렷하게 각인 하여라. 그리하여 이 소중한 것들을 잘 간직하여라.

아가야, 지금의 네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훗날에는 버거울 정도의 큰 감격이 들 것이다. 이즈음엔 맑은 밝은 많은 별을 보며 자라는 어린아이들이 매우 드물구나!

나니미.
이젠 가을편지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
연실에 쪽지를 실어 하늘에 보내듯, 연을 띄우는 맘으로 가을하늘에 편지를 썼다.
그리고 스치는 바람에 깜박거리는 별빛처럼 애잔한 계절, 이 가을에 너를 초대한다.
1998. 09.
-종이인형-



============= 토박이 말 ===============

* 가라지 : 밭에 난 강아지풀.
* 개밥바라기 : 저녁에 서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金星). 태백성.
* 고즈넉이 : 잠잠하고 호젓하게.
* 곱살스럽다 : 예쁘장하고 얌전하다.
* 귀띔 : 눈치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미리 일깨워 줌.
* 그루터기 : 나무나 곡식 따위의 줄기를 베고 남은 밑동.
* 나니미 : 나의 님.
* 나무초리 : 나뭇가지의 가느다란 부분.
* 널브러지다 : 너저분하게 널리 흩어지다.
* 눈부처 : 눈동자에 비쳐 나타난 사람의 형상.
* 닭울녘 : 닭이 울 즈음의 새벽.
* 도탑^ : 인정, 사랑, 정의가 깊고 탄탄하다.
* 물끄러미 : 우두커니 한 곳만 바라보는 모양.
* 미리내 : 밤하늘을 가로지른 띠 모양의 많은 별 무리. 은하(銀河)
* 버겁^ : 치르거나 다루기에 좀 벅차다.
* 섶 : 덩굴지거나 줄기가 약한 식물을 버티도록 꽂아 두는 꼬챙이.
* 송송하다 : 별빛이 초랑초랑하다.
* 시나브로 :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 아낙네 : 여자 어른을 주로 집의 아낙(부녀자가 거처하는 곳. 안방과 거기에 딸린 뜰을 이르는 말) 에서만 활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컫는 말.
* 애면글면 : 약한 힘으로 힘에 겨운 일을 이루려고 온 힘을 다하는 모양.
* 애오라지 : 좀 부족하나마 조금. 겨우.
* 오갈들다 : 식물의 잎 같은 것이 병이나 열 때문에 시들어 기운을 펴지 못하다.
* 움 : 베어 낸 줄기가 뿌리에서 새로 돋는 어린 싹.
* 으레 : 두말할 것 없이. 마땅히.
* 주접들다 : 생물체가 잘 자라지 못하거나 생기가 없어지다.
* 직수굿하다 : 항거함이 없이 풀기가 죽어 수그러져 있다.
* 푸성귀 : 사람이 가꾸어 기르거나 또는 저절로 난 온갖 나무들을 일컬음.
* 해오라기 : 백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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