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뜨기 종이인형입니다.
군인에게는 편지처럼 반가운 것도 없을 겁니다.
내가 입영통지서를 받았을 때,
여동생은 자기 친구들을 통해 위문편지를 많이 보내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그 장담은 속 빈 강정이었습니다.
같은 내무반의 어떤 전우는 하루가 멀다하고 날마다 애인에게서 꽃편지가 왔습니다.
나와 다른 전우들은 부럼 반 시샘 반으로 그 전우를 바라보곤 했는데,
제석이라는 친구가 문득 내무반의 동료들에게 공개제안을 했습니다.
자기에게는 예쁘고 귀여운 여고 2학년의 동생이 있는데,
여동생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동생을 소개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자기도 동생을 소개하겠다는 것이었죠.
나는 주저없이 제석의 제안에 동의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집주소와 여동생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맞바뀠습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제석의 여동생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군에 있는 오빠들의 뜻이 이러하니 집에 있는 동생들도 기꺼운 맘으로 협조하길 바란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보내고 일주일 가량 지난 후,
보낸이의 주소란에 '서나마나로부터'라고 적힌 낯선 글씨체의 편지가 내 앞으로 왔습니다.
제석이는 그 편지가 자기 여동생이 보낸 편지라는 것을 금새 알아보더군요.
난 들뜬 마음이었고, 다른 동료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을 그 편지지에 쏟았습니다.
하지만 제석이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속이 켕기는 눈치였습니다.
고운 꽃편지를 살살 뜯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찬찬히 읽어내려 갔습니다.
내 등뒤에선 다른 동료들이 서로 밀치며 같이 편지를 읽었습니다.
***
To. 종인 오빠.
어제는 밤새워 비가 내리고,
조용히 시작된 새벽은 부시시 준을 뜬 내게 있어 의욕을 불러 일으키기에 너무도 충분하게 느껴집니다.
웬지 넉넉한 이 아침,
끝없이 의문부호만을 남긴 채 날아온 오빠의 편지를 보자니 자꾸 웃음이 터져 나오네요.
(마치 덜떨어진 얘같이)
오빠의 제안에 대한 내 회답은 합격 아니면 불합격으로 나눠볼까 합니다.
먼저 이 제안은 펜벗이 필요하다는 말인 것 같은데,
얼마되지 않는 사람과 근래에 펜팔을 해봤지만 오빠처럼 엉뚱한 분과는 처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빠는 불합격 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이유는!
첫째; 저를 너무 당황케 했고,
둘째; 저를 고민케 했으며,
세째; 너무 엉뚱합니다.
이상의 이유로 불합격이오니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마시지 바랍니다.
1989. 6. 9.
옥.
***
편지를 읽어가면 히죽 벌어진 내 입을 점점 심각하게 오므라들었고,
같이 편지를 읽던 전우들은 내 기분따윈 아랑곳없이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뒤늦게 상황을 눈치 챈 제석이는
'역시 내 동생이야. 그렇게 만만하진 않지!' 라며 으쓱대며 깔깔대었습니다.
나를 에우던 동료들은 볼짱 다 봤다는 듯 파장마당처럼 자리를 떴고,
풀이 죽은 나는 뒷장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내가 혼자 키득거리자 몇몇 동료들이 다시 내게로 다가왔습니다.
난 그들에게 다음장의 편지지를 건네주었습니다.
동료들은 머리를 치며 감탄을 했고, 제석이는 벌레 씹은 양 떨떠름해 했습니다.
***
P.S.
때로는 엉뚱한 분도 필요할 것 같아 유쾌한 마음으로 귀하의 펜벗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제석이 오빠도 몸 건강히 지낼 것을 믿으며 이만 펜을 놓겠습니다.
약오르죠(메롱). 안녕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