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뜨기 박종인, 가을맞이 인사드립니다.
들녘엔 잠자리떼의 날갯짓이 한창입니다.
갈짓자 꼴의 움직임이 내 눈길을 이끄는군요.
푸르스름한 모과가 얼핏설핏 누르스름해질 이즈음,
우거진 고무마순으로 덮인 흙 속의 고구마는 둥실뭉실 굵어집니다.
어제 두둑히 덮힌 흙을 헤집고 고무마를 캐봤지요.
아이 주먹 만한 것도 있고, 어른 발 만한 것도 있더군요.
가느다란 줄기를 흙에 꽂았을 뿐인데 어느덧 옹골지게 알찬 고구마를 보니 흥겹더군요.
선홍빛 껍질을 벗기고 우적우적 씹어먹었습니다.
달짝지근하고 텁텁한 햅고구마의 맛이 제격이더군요.
'가을맞이'는 그러께 가을에 화천을 다녀 온 후 끼적거린 글입니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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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을 맞 이 ***
가을은
입추(立秋)가 지나고 처서(處暑)가 지났기에 온 것이 아니라,
코끝을 스치며 지나가는 공기가 모과향을 머금었기에
눈망울에 어리는 하늘이 그윽하고 높아만 가기에
귓바퀴에 머무는 배짱이의 울림이 고적하기에
입안에 고이는 감의 떫은맛이 사라졌기에
그리하여
시골 소녀의 양 볼에 패인 볼우물이 깊어가고,
늙은 농부의 이맛살 골이 깊이 패일수록
가을은 어름어름 다가온다.
1. 어릿광대의 미소
함초롬한 나니미야!
이슬비에 적삼 젖듯 푸성귀는 시나브로 가을빛으로 물들어간다. 그 널찍한 잎을 활짝 펼치며 하늘을 향해 넝쿨을 뻗치던 호박은 잎의 가장자리가 말라들고, 요강단지 닮은 늙은호박은 달덩이 마냥 노랗게 익어간다.
사월에 씨를 뿌렸는데, 석 달 새에 서른 해 자란 내 키보다 훨씬 커버린 얄미운 강냉이는 오갈들어 오글쪼글하다. 아직 잎샘추위가 가시지도 않은 삼월부터 싹을 틔웠던 냉이, 바랭이, 쇠비름, 명아주, 질경이, 가라지, 그령 등등은 햇살 고운 오뉴월엔 그루터기에 움트듯 지천에 널브러져 김매는 아낙네를 시름겹게 하더니, 이즈막엔 주접들어 그 기세도 한 풀 꺾여 시들부들하다.
한 밑동에서 자란 나뭇가지이지만, 그늘에 가려진 나무초리는 아직 풋풋한데 햇살을 잘 받은 나무초리의 단풍잎은 다른 잎보다 먼저 잎파랑이(엽록소)가 분해되며 꽃파랑이(화청소)로 변해 단풍이 들었다.
지지난달 투수콘 공사 때문에 뿌리가 잘리어 몸살을 앓은 데다가 잦은 비로 인해 일조량이 적었던 튤립나무는 벌써부터 조로(早老)현상을 보이며 낙엽이 진다.
잔디밭에 앉았다.
유난히 잠자리가 많이 날고 송장메뚜기도 부르릉거리며 날뛴다. 하늘이 얼마나 깊은지를 헤아리고자 치어다보니 아찔하다. 밝은 빛 가득 머금은 새하얀 솜구름은 뭉실뭉실하다. 해오라기 한 쌍이 하늘에서 다정스레 날고, 새털구름 너머엔 까마득한 비행기가 흰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너른 하늘을 가로지른다.
하늘, 바람, 나무, 새, 바위. 이들은 가을이 찾아왔음을 내게 넌지시 귀띔한다.
나니미,
난 가을도 잃어버리는 줄 알았어! 올 여름을 잃어버렸듯이.
이삭 팬 벼들은 한여름의 정령을 머금은 따사한 햇살을 고대했으나 사나운 빗살에 맥없이 쓰러지며 물에 잠기었다. 한시름 놓는가 싶더니만 이젠 벼멸구가 극성을 부린다.
한반도의 일년 평균 강우량이 1300㎜ 가량인데, 강화도에서는 하루 새 400㎜가 넘는 비가 내렸다. 심술궂은 사내아이(엘니뇨)는 천방지축 게릴라성 비를 뿌리며 이 나라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이곳저곳에는 물난리를 당한 흔적들이 나뒹굴고 있다.
하도 비가 많이 내려 '노아의 홍수'가 다시 올지 모른다는 염려도 하였지만 '무지개의 약속'이 있기에 그럴 리야 없겠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 지구는 물난리가 아니더라도 살아남기 힘든 암 말기의 중증 환자이다.
지구 곳곳에서 비정상적인 기상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그 동안 인간의 공격에 참고있던 지구의 반격이다. 지금 우리가 비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어떤 현상이 앞으로는 자연스런 현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든다.
사계절이 뚜렷한 금수강산이 10년 후, 아니 5년 후에도 그러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겨울에 비가 오고 봄에 장마가 있고 가을에 눈이 내리고 봄에 태풍이 오고,,,,,,,
이런 상황이 너무 비약된 것일까?
악어는 사냥감을 잡아먹으며 그 먹이가 불쌍하여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어릿광대는 관객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재롱을 피우며 미소를 짖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마존의 숲은 불살라지고, 시베리아의 산림은 베어지고, 남극의 빙산은 녹아들고, 북극의 오존층은 스러진다.
포악하고 힘이 센 몇몇의 '악어인간'들은 '지구'를 잡아먹으며 위선적인 거짓눈물을 흘린다. '어릿광대'가 되어 슬픔일랑 짙은 화장 속에 감추고 시름에 겨워 직수굿한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싶다.
가을,
이 가을이 왜 이렇게 반가운가!
높은 하늘이 왜 이렇게 소중하게 여겨지는 걸까?
감상에 젖어있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감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직은 아름다운 감상거리들이 조금이나마 남아있고,
이것들을 더 잃기 전에 내 가슴에 깊이 각인하고 싶어서이다.
나는 어릿광대가 되리라. 그리하여 지구를 사랑하는 순수하고 고운 가슴을 가진 관객들에게 재롱을 떨며 웃는 낯으로 말하리라. 이 가을은 아름답다고, 우리의 지구는 아름답다고.
속울음 삼키며 미소를 지으리라.
2. 아지랑이, 무지개, 하늘, 눈꽃, 노을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이 있구나.
이른봄, 개꼬리 마냥 휘어진 논두렁에 아련히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한여름, 한차례 소낙비가 지나간 후 펼친 우산 모양의 무지개
늦가을, 끝없이 높아만가는 눈이 부시도록 맑고 푸른 하늘
한겨울, 나뭇가지에 함박눈이 살포시 내려앉아 핀 눈꽃
사시사철 우리 주위에 깔린 이것들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아들과, 아들의 딸과, 손녀의 조카들 것이다.
나무에서 똑 딴 듯 산뜻한 나니미야,
노을진 서편 하늘을 고즈넉이 바라보며 서있다. 석양은 흰구름을 홍시빛으로 물들이더니 하늘까지 치자물을 들이고 있다.
햇살은 부챗살처럼 펴지며 산과 들과 강에게 안녕을 고하는 의식을 치루며 마지막을 가장 아름답게 장식하며 수그러든다.
'소지로'의 "대 황하"를 들으며 노을을 바라본다. 목가적인 오카리나의 울림이 정취를 더하는구나. 작은 거위를 닮은 오카리나를 입에 대고 연주곡을 따라 나도 소리를 내어본다. 석양이 퍼지듯 도자기로 만든 오카리나의 맑은 소리가 들녘에 퍼진다.
잠자리가 날고 송장메뚜기도 날아다니는 해질녘의 풍경이 그리 길지만은 않지만, 그 애잔한 풍경은 여운을 남기며 오래도록 가슴 속에 남아있다.
이 흥을 살려 노래를 부르고 싶다. 내 기타 반주에 맞춰 임과 어울림 좋은 가락을 뽑고 싶다.
불그레한 그대의 볼을 보며, 그대의 눈동자에 어린 나의 눈부처를 바라보며, 그렇게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노을을 배경 삼아 노래를 부르고 싶구나.
귀뚜라미가 같이 화음을 맞출 것이고 지나가던 구름이 머물러 우리의 노랫가락을 들을 것이다.
이슬, 조약돌, 도래샘, 뭉게구름, 햇무리, 산들바람, 별똥, 반딧불이, 송이, 함박눈.
이것들은 너무나 아름다운 신의 선물이다. 우리는 이 선물을 '돼지가 진주 다루 듯' 하지 말고 '고양이 계란 굴리 듯' 애면글면 다루어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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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어의 눈물
선진국들은 지난날 환경을 오염시키며 자국의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지금에 와서는 거짓눈물을 흘리면서 후진국들의 개발을 저지하고 있다.
비교적 부유한 수도권 사람들은 자기들이 맑은 물을 먹기 위해 비교적 가난한 강원도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대기업들은 지난날 환경을 오염시키며 성장을 하였고, 지금은 그 산업들은 중소기업에게 넘기고는 환경보호 비용을 고스란히 떠넘긴다.
오늘날에 와서는 후진국, 강원도 사람, 중소기업체가 환경을 파괴하는 주체인 양 보도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병든 지구를 만든 이들은 현재 뱃속이 든든한 힘있는 나라이고, 재력이 든든한 대기업이고, 문명생활을 하는 도시인이다.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한 방울의 피를 나누어야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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