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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안 룰렛

글쓰기/시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0. 8. 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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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매일 죽음을 맞닥뜨리는 '러시안 룰렛'이다.


태양이 지구를 돌 듯 회전식 연발권총의 실린더가 시나브로 돌고,
태양이 함지(咸池)에 빠지는 순간 방아쇠는 당겨진다.
다행이 죽지 않았다면
다음날 태양이 부상(扶桑)에서 부상(浮上)할 때 노리쇠는 다시 뒤로 당겨지고,
실린더는 한 칸 돌며 새로운 사격을 대기한다.


단 하나의 총알이 실린더의 어느 구멍에 있는지는 귀신도 모른다.
사람의 평균수명을 60세라고 가정하면 확률은 대략 1/22,000이다.
죽음의 때가 어떤 이는 빠르고 어떤 이는 더디기도 하겠지만,
실린더가 한 칸씩 돌 때마다 죽을 확률은 점점 커진다.


매일 죽을 각오로 삶을 맞이하는 사람은
결코 생을 가벼이 여기지도, 가이없이 여기기도, 부담스럽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개가 먹이통의 바닥을 샅샅이 핥듯 삶을 알뜰살뜰하게 꾸려나갈 것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뻐기다가 갑자기 닥친 죽음을 앞두고 허둥지둥하기보다는
겸허한 맘으로 오늘을 허락하신 신께 감사하며 하루를 맞이한다면,
내일 아니 당장 오늘 죽더라도 차분하게 삶을 끝막음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수많은 날들 중에 '단지' 하루가 아니라,
평생에 한번밖에 없는 '오직' 하루이다.
내 삶에 있어 2000년 8월 3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오늘'에만 있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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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뻐기다 : 잘난 체하고 으쓱거리며 뽐내다.
* 부상(浮上) : 위로 떠오르다.
* 부상(扶桑) : 해가 뜨는 동쪽 바다 속에 있다고 한 상상의 신성한 나무. 또, 그 나무가 있는 곳.
* 함지(咸池) : 해가 진다고 하는 큰 못.
* 러시안 룰렛 : 회전식 연발 권총에 총알을 한 발만 넣고 총알의 위치를 알 수 없도록 탄창을 돌린 뒤 몇 사람이 차례로 자기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목숨을 거는 내기.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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