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가을이 짧다.
노고단 산마루의 나무들은 비 온 후 젓은 빗물을 털 듯 나뭇잎을 한꺼번에 털어버렸다.
산 아래는 아직 푸른 기운이 있는데, 산마루는 회색 나무로 서 있다.
뭐가 그리 급했을까?
우리가 보지 못한 뭔가를 미리 본 걸까?
오후 햇살에 비낀 노고단의 회색 나무는 산 아래에 사는 우리들에게 경이감을 풍기고 있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물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한 선비의 집에 들렀다.
아무리 둘러봐도 눈길은 산을 벗어날 수 없는 지리산의 산중이다.
때마침 보름달은 산에서 솟아올라 우릴 비추고, 군불 땐 토방에서 빙 둘러앉아 도를 나눈다.
20년을 넘게 공부하며 퇴계의 맥을 잇는 선비인 정산 선생은 지리산에 자리를 잡았다.
그 선비는 토방에 군불을 때고 우릴 맞이하였다.
그 정산 선생으로부터 정도를 듣다가, 같이 내려간 철학을 전공한 소설가에게 탁도를 듵다가, 사이에 내가 하모니카를 불고, 또 사이에 작가의 자작시를 듣고 흥에 겨우면 노래도 불렀다.
밤은 그윽히 깊어 새벽 1시가 넘었다.
마당에 나오니 보름달이 하늘 정수리에 이르렀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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