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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루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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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인형 꿈틀이 2013. 1. 8.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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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의 생활을 미리 작성해본다.

지금부터 준비하는게 은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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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루에 서서

 

아침산행에서 가장 큰 에너지를 쓰는 것은 정지마찰력을 극복하며 현관문을 나서는 것이다. 일단 끈끈이 같은 이부자리를 벗어나 숲길로 접어들면 몸은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정상을 향해 스르륵 당겨진다.

산마루에 다다르니 시야가 트인다. 주변의 숲속과 먼발치의 산부리도 보인다. 이쪽은 지나온 오르막길, 저쪽은 지나갈 내리막길. 정상에 오르고서야 알았다, 산행은 오르는 등산으로 마치는 게 아니라 내려가는 하산으로 마친다는 걸.

산길을 오를 땐 나무만 보이더니 정상에 오르니 숲이 보인다. 떡갈나무와 잣나무가 어울러져 수풀을 이루었고, 골짜기와 등성이가 이어져서 산자락을 이루었다. 가쁘게 오른 그 비탈길을 돌이켜본다. 그러면서 지난 내 인생도 돌이켜본다.

 

 

마흔을 넘긴 내 인생을 산행으로 견주자면 정상에 섰다. 풀씨만한 점이 청년의 몸으로 자랐으며, 나름의 뜻을 세우고 자립하여 사회인이 되었고, 부모를 떠나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나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며, 지금은 도농복합도시에 살고 있다. 그때에 바나나는 구경도 못했지만 산으로 들로 다니며 따먹던 머루와 으름은 더 없이 달콤했으며, 마을 주변의 숲정이는 아파트의 놀이터보다 훨씬 생기 있고 재밌는 곳이었다.

공고를 졸업하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입대를 하였는데, 진로를 고민하던 중 농업분야로 정했다. 가진 땅이 없으니 직접 농사를 짓기는 어려워 농업직 공무원을 생각했다. 전역 후 독학학사학위취득을 준비하며 7전8기 끝에 국가농업직 공무원이 되고, 다시 농촌지도사로 이어진 진로는 연어와 같은 마음이었다.

 

 

나는 농업기술센터에서 근무하는 농촌지도사이다. 우리 기관은 작물 재배 기술지도, 농촌관광 및 생활개선, 토양검정과 병해충진단 등 과학영농 서비스를 지원하는 곳이다. 내가 이곳에서 근무한 지 10년이 되었고, 15년 후에는 은퇴를 할 것이다. 은퇴 후 난 무얼 하고 있을까? 마찬가지로 농업의 언저리에 있을 것이다.

 

지금은 농사짓는 농업인을 거드는 입장이지만 그때는 직접 농사를 지을 것이다. 하지만 농사의 방향은 지금과 다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한 농사가 아니라, 돈을 적게 쓰기 위한 농사이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전업농은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고, 돈을 적게 써야 하는 은퇴자는 <생활>을 위해 농사를 짓는다.

 

전업농은 유행에 따라 작물을 선택하고, 각종 시설과 농기계를 투입하며 화학비료와 농약을 의지해야 하고, 대규모의 토지에서 농산물을 대량생산해야 많은 돈을 벌어 생계를 꾸릴 수 있다. 하지만 은퇴 후 텃밭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자기가 필요한 작목을 재배하여 자기가 소비하는 것이다. 이는 필요한 먹거리를 직접 해결하기에 식료품 지출을 아낄 수 있으며, 안전하고 싱싱한 친환경 농산물을 먹으니 의료비를 줄일 수 있다.

적도를 넘어서면 자극(磁極)이 바뀌듯 은퇴를 기준으로 돈에 대한 관리도 달라져야 한다. ‘더 버는 생산에서, 덜 쓰는 소비'로 말이다.

 

 

텃밭농사는 규모가 적고, 거리가 가깝고, 투자가 적고, 작목이 다양한 자연친화적 육체노동이다.

 

규모는 노년의 부부가 감당할만한 면적으로 10a(300평) 내외가 적당하고, 거리는 집에서 걸어서 접근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며, 투자는 많은 비용이 드는 농기계 구입 및 시설 설치를 지양해야 하고, 작목은 자기가 필요한 작목 위주로 골고루 심는 것이다.

 

자연친화적 육체노동은 퇴비를 만들고 풀을 뽑고 땅을 일구는 노동을 통해 몸에 근력을 유지하고, 흙에 지렁이와 미생물이 생존토록 하는 친환경농사를 말한다. 전원생활을 하는 은퇴자에게 텃밭농업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해서 즐거운 일'이다. 가장 좋은 직업은 보수 없이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인데, 텃밭농사는 지위, 권력, 수입, 승진 같은 요소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즐거운 일이 아닌가?

 

 

<노후생활을 어디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은퇴준비의 첫걸음이다. 주거지 성향은 도시생활형과 전원생활형으로 나눌 수 있다. 각종 편의시설 등을 이용하고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기 원하는 이들은 도시생활형이고, 한적한 전원생활을 누리고 싶은 이들은 전원생활형이다.

 

국토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은퇴 후 도시생활 희망자는 33.8%이고, 전원생활 희망자는 45.2%로 전원생활을 희망하는 이들이 더 많다. 자연 속에서 동식물과 어우러져 사는 노인들이 몸이나 맘이 더 풍요로워져서 수명이 증가하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러나 은퇴 후 주거지에 대한 결정은 부부의 동의가 필히 필요하다. 대체로 남편의 경우 전원생활형인 경향이 많으나 아내의 경우는 도시생활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다.

 

내 아내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내기다. 시골뜨기인 나와 결혼 후에는 본인도 시골생활에 적응하려는 의지를 보이더니, 지지난해 시골에 땅을 사는데 있어서 나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어차피 당신은 은퇴 후에 시골로 갈 사람이니 조금이라도 젊은 때 가서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

 

30대에 결혼하면서 아내에게 말했었다. 40대에는 시골에 땅을 사고, 50대에는 그 땅에 집을 짓고, 60대에는 그 집에서 전원생활을 하자고. 그 말대로 우린 도시생활형 사람들의 희망인 아파트 구입을 접는 대신에 뒷산이 딸린 땅을 샀다. 몇 년 후엔 그 땅에다가 내가 디자인한 개성적이고 독특한 집을 지을 것이며, 은퇴 후에는 그 집에서 소일을 하며 노후를 보낼 생각이다.

 

지금 내 나이는 마흔과 쉰 사이, 팔십 인생 여정의 허리 즈음이다. 인생 후반기를 차분하게 연착륙하기 위해서 노후생활에 대한 생각을 정리코자 한다.

 

 

 

<자기계발>

 

행복하게 나이 드는 법은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배우기 위해 책을 읽고, 배운 것을 나누기 위해 책을 펴내고자 한다. 평생 읽고 쓰는 활동을 할 생각이지만, 은퇴 전에는 읽는데 더 치중하고 쓰는 것은 은퇴 후에 하고자 한다.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하고, 아직은 눈이 밝아 글씨를 읽을 수 있을 때 더 읽어두려는 의도이다. 벌써 노안으로 인해 책읽기가 편치 않지만 더 불편해지기 전에 많은 책들을 읽고 싶다.

 

얼마나 많이 읽을까? 수불석권(手不釋卷), 콩나물시루에 매일 물을 붓듯 책을 읽자! 콩나물에 주는 물은 모두 밑으로 빠져버려서 쓸모없어 보이지만, 그 쓸모없어 보이는 물 덕분에 콩나물은 자란다.

 

 

 

<인간관계>

 

행복에 영향을 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가족관계이며, 인생의 말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경제적 빈곤이 아니라 사랑의 빈곤이다. 은퇴 후에 가장 가까운 친구는 배우자이다. 부부가 같이 참여하는 활동은 돈독한 관계형성에 도움이 된다.

최근에 아내와 같이 문화봉사단의 난타팀에 들어갔다. 난타팀은 지역행사, 경로행사, 사회시설 등에 초대되어 공연기부를 하고 있다. 우리는 직장생활을 하니 거의 기부공연에는 참석하지 못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많아지면 기꺼이 참여할 생각이다.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50代 이후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47세 무렵까지 만들어 놓은 인간관계’라고 했다. 같은 교회에서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여섯 가정이 모임을 만들었는데, 지난 10년간 여름휴가를 같이 보내고 있으며, 매달 집마다 돌아가며 모임을 갖고 있다. 이 모임의 부부들은 내 형제․자매와 같고,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을 지켜본 그 아이들은 내 자식과도 같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교재하며 지낼 것이다.

 

 

 

<재무관리>

 

모 생명보험에서 노후에 월 생활비 예상금액을 물으니 중산층이 200~300만원이라고 대답했다. 이를 대비하여 연금과 저축을 가입했다. 이런 일상적인 생활비 외에 노후에는 질병으로 인해 목돈이 들어갈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한 대비는 별도의 암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그러나 내일을 위한 이런 연금과 저축, 그리고 보험으로 지출되는 부분이 오늘의 생활에 큰 무리를 줄 정도로 편성하지는 말자. 내일의 보장을 위해 오늘의 행복이 저당 잡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 이후로는 경제축소의 시대이다. 2010년 ‘핵심 생산가능인구’가 처음으로 감소하였고, 베이비부머가 완전히 은퇴하는 2018년 이후에는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이 2% 이하로 하락할 전망이다. 섣불리 투자하지 말고 알뜰한 지출관리를 해야 한다.

 

 

 

<경제활동>

 

은퇴 후에도 일은 계속해야 한다. 노동은 몸과 마음을 활기 있게 한다. 다만 힘이 부치는 일은 지양해야 하며, 소득에 대한 기대도 낮춰야 한다.

내가 일하려는 분야는 ‘융합농업’이다. 내 전공분야와 관심분야를 접목한 일인데, 농업과 취미를 겸한 산업곤충, 농업과 미술을 겸한 압화공예, 농업과 식품을 겸한 산야초효소 등이다. 노동과 비용은 적게 들지만 디자인과 창의력을 곁들이면 신나고도 살뜰한 경제생활이 가능하다.

 

은퇴 후 지낼 곳은 집 뒤에 산이 있기에 곤충과 산야초 등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산업곤충은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나비 등이며 이것들을 이용하여 생물 교육용 표본을 만들고, 아이들의 애완용으로도 판매할 수 있다. 흙을 살리는 지렁이를 길러 텃밭농사를 거들게 하고, 지렁이 분변토는 친환경자재로도 판매할 수 있다. 산에서 버섯을 채취하고, 약초를 캐며, 온실에서 난초를 재배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것들을 활용하는 것은 솔찬한 재미와 짭짭한 소득도 안겨줄 것이다.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산마루다. 챙겨간 물병도 비우고, 몸의 긴장도 풀었고, 마음의 시름도 덜어냈다. 이제 산을 내려간다. 오를 때는 멍에 맨 황소처럼 발걸음은 무겁고 들숨이 버거웠지만, 내려갈 때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발걸음은 가볍고 날숨이 가뿐하다.

산을 내려오면서 아내가 말했다. 만약 우리가 식물인간상태가 되거나 소생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면 억지로 목숨을 붙잡지는 말자고.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사전의료지시서(Advance Directive)>는 본인이 의식이 없을 때를 대비하여 자신이 받을 치료범위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미리 고지하는 것인데, 죽음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은 죽음을 ‘당한다’라기보다는 '맞이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잘 죽는 법, 즉 웰다잉(well-dying)이다.

 

죽음에도 질의 차이가 있다. 40개국 나라를 비교해보니 영국이 1위, 호주가 2위, 뉴질랜드가 3위이고 우리나라는 32위로 나타났다. 완화의료(Hospice)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원하는 방식으로 살다 갈 수 있도록 적절하게 통증을 조절해주고 심리적 안정을 위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완화의료보다는 연명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말기암 환자들이 완화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비율은 9%인데 비해 대만은 20%이며, 미국은 전체 질병 사망자를 기준으로 할 때 41%로나 된다.

 

젊은이에게는 채움이 자랑이지만 늙은이에게는 비움이 미덕이다. 비우는 과정에는 몸에 대한 내려놓음도 해당된다. 영혼이 몸을 떠나려 할 때 몸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것은 가벼운 민들레 여행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이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집착이고, 몽골의 풍장(風葬)이야말로 비움의 미덕이 아닐까!

 

몸이 늙어 결국에는 숨이 멈추더라도 그리 슬퍼하지 말자. 숯이 재가 된다고 슬퍼하던가! 숯은 사그라져 한 줌의 재가 되었지만 숯의 열로 인해 누군가의 시린 품은 포근해졌다.

아내와 나는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사후 각막과 장기를 기증했다.

홀가분한 산행이다. ♠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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