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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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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인형 꿈틀이 2011. 3. 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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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름

-구제역 발생 100일째, 구제역방역초소에서-

 

 

저기 내일이 슬금슬금 기어온다.

그 내일이 오늘로 넘어오니 오늘은 어제로 밀려났다.

나는 긴 한숨 쉴만한 짬에 두 날을 머문 꼴이 되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서로 자리를 내주는 하루의 어름이다.

 

길 건너 3층 건물 벽에 매달린 광고등이 팽이처럼 빙그르르 돈다.

<호텔식 마사지/3층/백악관>

분명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불을 밝히며 제자리를 맴도는데 정작 보는 사람이 없는 자정 무렵이다.

 

간간히 다리를 건너오던 차들이 방역기 앞에서 멈칫한다.

뭠췄다가 차가 다가오면 하얀 소독약을 담배연기처럼 내뿜는 소독기,

머춤한 차는 이내 체념한 듯 노즐이 깔린 방지 턱을 살짝궁 넘는다.

그러고 나서 이마 땀을 닦아내듯 앞유리창을 닦아내며 줄행랑을 친다.

 

주황색 신호등만 홀로 깜박이는 밤, 빨강과 초록의 신호등은 잠이 들었다.

방역초소에 지원나온 군인들도 한 명만 깨어있고 둘은 졸고 있다.

 

하루는 왜 이리 깊은 밤에 날의 교대를 할까?

어떤 비밀이 있기에, 아님 수줍음이 많아서일까?

하루는 우렁각시처럼 아침마다 새날을 차린다.

 

이렇게 소리없이 지나간 하루는 이미 어제가 되었고,

늘 그랬듯이 내일은 오늘이 되어 하루의 안방마님이다.

 

때의 어름이 스친 나는 곳의 어름에 머물러 있다.

청미천을 사이에 두고 장호원읍과 감곡면이 마주하고 있다.

난 이 두 곳의 경계에서 장호원의 끝에 있다.

이곳은 이천시이고 저곳은 음성군이다.

나는 경기도에서 충청북도를 바라보고 있다.

 

간간이 다리를 넘어오는 차는 방금 충청도에 있었는데 이제 경기도에 있는 것이다.

경기도에 있는 내가 조금만 걸으면 충청도를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때와 곳의 어름에서 난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때는 내가 가만 있어도 경계를 바꾸지만, 곳은 내가 움직여야만 경계가 바뀐다.

 

나는 수많은 관계와 소속의 테두리를 가지고 있다.

어떤 테두리는 벗어날 수도 있지만 어떤 테두리는 벗어날 수 없기도 하다.

경계에 선 내 모양이 나의 의지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나는 때때로 이 모양 저 모양, 이 색깔 저 색깔이다.

나는 다만 이 때 이 곳에 있다!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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