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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

글쓰기/시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2. 4. 1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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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

벗아,
겨울의 눈이 있고 봄의 눈이 있어.
겨울의 눈은 당장은 화려하고 우아하여 살아있는 듯 하지만
날이 풀려 따뜻해지면 금방 스러져 흔적조차 없어져 버리지.
봄의 눈은 깍지벌레처럼 나뭇가지에 옴짝달싹 않고 매달려있지만
날이 풀려 따뜻해지면 긴잠을 깨고 눈을 떠서 잎과 꽃을 내지.

긴 겨울동안 눈(雪) 속의 나무눈은 봄을 꿈꾸며 잠이 들었다가
봄날이 되어 꿈을 이루러 깨어난 거야.
나무의 눈이 겨울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봄을 꿈꿨기 때문이야.
자신의 숨은 자아를 고이 간직한 덕이지.

벗아,
눈을 떠.
네 꿈, 그 꿈을 잠시 접어두었다면 이제 다시 꿈틀거리렴.
네 안에 잠자는 꿈을 깨워 잎을 내고 꽃을 피워 열매을 맺으렴.
우리의 이름은 '꿈.틀.이.'

-종이인형-



<덧붙이는 글>

"꿈틀아, 네 이름이 왜 꿈틀이냐!"
흙지킴이의 갑작스런 물음에 꿈틀이는 더듬거렸다.
"그야 꿈틀거리며 기어다니니 …꿈틀이죠."
꿈틀이는 자기 이름을 설명할 때마다 왠지 기가 죽었다.
"꿈틀거리는 꿈틀이야, 이제 너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겠다."
흙지킴이의 말에 꿈틀이는 솔깃하였다. 어떤 이름일까? 이왕이면 꿈틀이보다는 좀더 우아하고 고상한 이름이었으면 좋겠구나. 초롬이, 함함이, 날쌘이, 우아미, 맑은슬기, 밝은눈, 빛나리, 참이슬, 미리앎, 이런 이름들도 괜찮겠는데. 꿈틀이는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는 것에 너무 기뻐서 뛸듯했다.
"네 새로운 이름은 `꿈틀이'다!"
꿈틀이는 자기가 잘못 들었나 의심했다. 새로운 이름을 준다고 하여 잔뜩 기대를 하였는데 또다시 꿈틀이라니! 꿈틀이의 기분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흙지킴이는 다시 꿈틀이를 불렀다.
"꿈틀아! 넌 이제부터 `꿈틀거리는' 꿈틀이가 아니라, `꿈을 트는 이'로서 꿈틀이다. 껍질에 싸인 움이 트여 꽃봉오리가 벌어지듯, 새벽이 지나 동이 트며 새날이 펼쳐지듯, 막혔던 것을 트고 스스럼없는 관계를 갖듯이 너는 이런 꿈들을 트는 둥지가 되어라. 네가 품은 고귀한 `꿈움'을 살포시 터 환한 `꿈꽃'이 해맑게 피길 바란다."
꿈틀이는 처음엔 똑같은 이름에 적이 실망했으나 `꿈틀이'라는 이름의 참뜻을 알고는 억누를 수 없는 감격과 숙연한 다짐이 들었다.
"꿈틀아, 예전의 네 이름은 몸짓의 꼴이었지만, 지금은 마음의 꼴이 이름이 되었다. 어리석은 이는 아직도 네 이름의 겉뜻만 가지고 널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개의치 말아라. 어리석은 이는 어리석은 대로 내버려두어라."

-박종인의 단편소설 <흙이 된 지렁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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