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스크랩] 페루에서 열었던 한글교실-21번째 안데스리포트

박우물(둘째형)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7. 3. 15. 09:01

본문





작년 9,10월정도에 아레끼빠에서 한글교실을 열었다.

명색이 페루 제 2수도라지만 한국봉사단원 5명, 제대로 인사도 못나눈 선교사 2가정등 그리고 공부차 왔던 나와 조카까지 단 15명이 채 안되는 도시에서 한국과 한글의 위상인들 있으면 얼마나 있었을까?

열거한 사람들도 그나마 우리와 교류는 코이카봉사단원중 키를 보고 뽑았냐는 농담이 나올법한 183,184cm두 훤칠한 청년 태권도 관장 김진건군과 대학에서 식품영양학 계통으로 강의를 하는 지현석군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때 '천국의 계단'이 인기리 방영중이던 때라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이란 나라를 알고 싶어하고 언어를 공부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주변에서도 곧잘 보였었다.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너무 취약한 이곳에서 하루하루 물고기를 건네주는 것보다 고기를 낚을 수 있는 안정된 기틀을 만들어주자는 마음의 발로가 시작의 원인이기도 했다.

물론 일이 진행될때는 부수적인 일도 따르는 법이다.

아레끼빠 시에 한국인들 손으로 신도시가 건설된다는 보도도 있었고-아직도 진척은 없다- '천국의 계단'을 통한 '보고싶다'라는 노래의 힛트등이 더 결심을 굳힌 계기가 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잘 가는 DVD판매점 앞을 지나다 처음 '보고싶다' 음악이 나올 때 너무 반가워 주인에게 이거 한국 음악인 줄 아느냐고 했더니 그냥 인기가 많아 가게에서 계속 틀어준다고 한다.

그 노래는 나중 나에게 어처구니 없지만 유쾌하고 황당한 경험을 안겨주었는데 며칠 지나 그 집앞을 지나며 보니 관광객들인지 대여섯 영어를 사용하는 백인 젊은들이 음악비디오를 열심히 보는게 아닌가.

보는 정도가 아니라 리더인 듯한 아이가 설명까지 해 호기심에 들어보니 이 영상은 지금 사랑하는 남녀의 애절함을 담고 있고 음악과 영상이 기가막히게 매칭이 잘되고 있다는 식으로 안내를 한다. 물론 자막은 없었다.

우리 음악을 안내하는 그에게 괜한 고마움이 앞서 괜한 참견을 하며 물어보았다.

"저 드라마와 음악이 어느 나라것인지 알아요?"

"모르는데요."

엥, 이게 무슨 소린가 싶지만 다들 걸음을 멈추고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는 또래 백인 아이들 보는데서 녀석을 망신줘서는 안될 것 같아 한국인임을 밝힌후 너의 말처럼 얼추 다 맞는 내용이라 하고 한글도 모르면서 어찌 그리 유추를 잘하냐고 물었더니 녀석 왈

"간단하죠. 가슴으로요."

"....."

아마 그때 뒤의 다른 청년이 녀석의 어깨를 대단하다는 듯 툭 쳐주었을 것이다. 


한글 수강자들은 후안기자 자녀들 장녀인 에밀리와 반에서 1등을 거의 놓치지 않는 차녀 웬디, 그리고 같이 있는 음악동료의 여식인 ?馝?가 대상이었고 부모들에게 물어보니 좋다며 당사자들도 흔쾌히 동의한다.


첫 수업.

한국어는 발음이 다 가능하고 다만 관계와 나이에 따른 경어사용과 상황에 따른 세분화된 표현들이 단순히 'Usted' 존칭어 하나 붙이면 끝나는 에스빠뇰이나 상대방을 부를 때 'You'하나로 모두 뭉뚱그려 보이는 영어에 비해 최소 2-3배는 표현력과 암기 할 상황이 많아서 배울수록 어렵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물론 발음하는 것은 첫 수업 1시간내에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도 곁들여서.


가르친 경험이 일천하다보니 생각나는 대로 상황에 맞춰 간단한 표현부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안녕히 주무세요'도 있지만 '잘자요', '안녕히 가세요'는 '잘가요'등으로.

그리고 음악에 관심을 많이 가진 애들 성향을 고려하여 매일 노래 하나를 가르쳐주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다. 1호작은 당연히 '아리랑'이다.

간단한 동요도 자주 활용하였는데 '무엇이 무엇이 똑 같을까. 젓가락 두짝이 똑 같아요'를 부르면서 숫가락과 젓가락을 직접 보여주고 사용법도 가르쳐주었다.

송창식의 '가나다라' 노래로 한글과 숫자를 선보일때 녀석들은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연방 까르르 웃어댄다.


여행으로 움직이지 않을 때는 일요일만 빼고 주말까지 매일 수업을 진행하였다.  

선교사가 되고 싶어하는 에밀리는 낮에 개인지도까지 하였지만 1달이 넘어가자 어느순간부터 둘다 매너리즘에 빠지기 시작한 것 같다.

서로 의무감때문에 칠판에 글을 적고 베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중간중간 몇몇 사람들이 한국어 교실에 합류하겠다며 다녀갔다.

그러나 마음뿐인지 쉽게 온 사람들은 역시 그렇게 소리소문없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다 오빠나 동생에 비해 학업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조울증 증세도 있는 에밀리와도 의사소통문제로 개인레슨이 중단되었다.

오해의 발단은 한국나이로 하면 여고생뻘이지만-현지 나이로 여자는 15살 남자는 18살쯤 되면 성인식 비슷한 행사에다 실질적으로 그리 인정하는 풍토임-녀석은 세뇨리따로 인정되길 바랬던 것 같다. 

한국식 표현상 예쁘고 사랑스런 사람에게 '우리 애기' '우리 강아지'라는 애칭을 쓴다며 그렇게 표현을 해주었는데 감정 기복이 일반인에 비해 심한 녀석이

"노, 나는 베베(아기) 아녜요. 세뇨리따라구요."

생각지도 않은 거부반응을 보이며 집으로 가버리길래 엄마랑 상의후 다음부터는 이곳 전통방식인 포옹이나 베소(입맞춤)등 일절 의례적인 인사관련 가벼운 신체접촉까지 자제를 하고 철저히 세뇨리따로 대해주었다.

엄마가 건네준 에밀리의 상담기록은 어렸을때부터 조울증이라는 진단이 첨부되어있었다. 그래서 녀석이 기분 좋으면 과장스런 애정표현이나 도를 넘은 장난스런 행동을 하고 반면 땅이 꺼지게 한숨지으며 기분이 가라앉은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던게 이해되었다.


한편 한국 전통관념인 군사부 일체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존경심을 유발하도록 연필하나 건네면서도 상대방이 사용하기 편하도록 손잡이 쪽을 쥐게끔 전달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항시 상대방 배려'Para Ti'(For You, After You:당신을 위해, 당신 먼저)라고 하면서.


예절교육을 필요로 한 것은 우리 한국인들끼리 우연히 만났던 시내 교회의 예배때 무슨 세미나를 수료후 모두 어이없어 실소를 터뜨린 한 장면에서 시작된다.

수료증서를 건네주는 목회자도 한손으로 전달하고 수료자들도 확 뺏아가는 것처럼 한손으로 받아가며 가벼운 목례조차 없는 것을 보자 한국식 사고방식에 젖은 반항기 우리 조카녀석까지 '에이 저게 뭐야' 하며 어이없어 하였던 일이 있어서다.

그렇쟎아도 태권도 관원들을 직접 지도하는 김군은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비해 지각을 해도 사과를 모르는 태도나 무도사회에서 하늘같은 사부를 어린 애들이 호칭하면서 '호벤(젊은이, 총각)'이라 부른다며 어이없어 해왔던 터다.


이곳에도 UNSA(국립대학)에 한국어가 특별프로그램으로 신설되어있다.

바로 한국 코이카봉사단원중 어학에 재능있는 타 대학 후배 문예창작과 출신 세뇨리따가 강사인데 어느날 의학박사와 심리학 박사들이 강연하는 대학학술세미나에 단독 찬조공연으로 대학강당에서 초청공연을 하고 바로 그 제자들 중 한명을 만날 수 있었다.

강당 뒷편에 쫘악 고명한 박사 강연자들이 앉아 있고 나는 그날 팝송과 에스빠뇰 노래, 그리고 한국의 '엘꼰도르 빠사'인 '아리랑'을 유쾌하게 부르고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세뇨리따 박 아시죠. 저는 그분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제자입니다."

어순은 틀렸지만 비교적 유창히 한국말로 자기 소개를 하는 수강생이 내가 꼬레아노임을 알고 즉각 따라와 인사를 한다. 

애초 시작했던 인원보다 현재는 더 적어졌다지만 그래도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과 간단하게나마 의사소통을 하니 반가웠다.


그렇게 서툴지만 조금씩 한국어로 대화를 하는 사람들에 비해 내 아이들은 저리도 한국말이 안느는가 싶어-사실 한국어가 영어처럼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험때면 학교공부가 항상 우선인 웬디는 내 수업은 항상 뒷전이었다-절로 목소리를 높인 날이 있었나 보다.

여기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체벌이나 화를 내는 것이 상상이 어려운 듯 그날 정말 생경하게 나를 바라보던 아이들과 그래도 조금 컸다고 "작은 아빠, 왜 그래요."하며 애들을 대신화 화를 자제하라는 에밀리의 목소리만 돌아왔을 뿐이다.

아마 내가 심신이 피곤하였는지, 그보다는 물빠진 독에 부어대는 헛수고처럼 자괴감이 밀려와서였는지는 모르지만 화를 꾹꾹 눌러 말을 했어도 사람은 영적인 존재라서 바로 내 심리상태가 노출된 것 같다.  

나야 학원을 안다니면서 공부했으니 속썩힐 에스빠뇰 사부도 없었지만 아마 우리 조카를 가르친 개인교사들이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것을 이해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2007년이 되고 아르헨티나까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몇번 웬디가 빠지더니 에밀리엄마가 방문하였다.

"웬디는 방학인데 오늘 바쁘나봐요?"

"에르마노(형제) 박, 사실은...."

부부가 모두 신문방송학과 출신인 나와 동갑내기 에밀리엄마 모리네레는 두 아이 모두가 한국어 수업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하면서 이쯤해서 수업을 마쳐야할 것 같다고 내가 상처를 받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이유인즉 차녀인 웬디는 학습능력은 좋지만 실질적으로 한국어를 왜배워야 하나 하는 당위성 문제에 빠졌고, 장녀인 에밀리는 누구보다 배우고 싶고 항상 남들보다 배는 노력하지만 자신의 학습능력에 대한 회의감으로 집에서 울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보다못해 아이들과 상의후 통보를 하러 온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 얼굴은 많이 굳어갔다.

한글을 가르쳐서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었나 싶게 내 시간은 물론, 초창기부터 주기적으로 아이들 식사까지 거의 매일, 그러다 부모들이 매일 식사를 챙겨주는 것까지 부담스러워 해서 멈추고 그래도 정기적으로 주말은 오전 공부후 항상 피자집이나 중국집으로 데려가 대접하면서 과정을 이끌어 왔던 것이 거품처럼 돼가는 것이 안타까워서였다.

"작은 아빠, 미안해요. 전 잘하고 싶은데 머리가 안되나 봐요."

에밀리는 기어코 눈물을 보이더니 자기 스스로 안겨서 한참을 울다 돌아갔다.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중학생 ?馝?만이 어찌할바를 모르며 나를 쳐다본다.

"?馝?, 오늘은 내가 기분이 영 아니구나. 너도 그만둘 것 같으면 내일까지 말해줘. 큰아빠는 괜찮아. 하지만 네가 혼자라도 정해진 시간에 오면 그렇게 계속 공부하도록 할께.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애니매이션 주인공 캔디 머리를 한 ?馝?는 고개를 까닥이고 바로 집으로 갔다. 그니 아빠는 나보다 5살이 적어서 깰리는 나를 항상 큰아빠라고 불렀다. 


다음날 어김없이 ?馝?는 혼자 나타나서 내게 특별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음악을 혼자 공부해왔던 나는 강남 모교회에서 중고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어렸을때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플륫 학원에서 계속 훈련을 해오던 애들을 봐왔지만 훈련받은 기능에 비해 음악 자체를 싫어하거나 흥미를 못느끼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렇게 결론을 내렸었다.

'맞아,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결국 열정 앞에는 재능도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을거야.'

?馝?는 그런 아이였다. 총명함으로만 본다면 웬디가 가장 앞서 있지만 웬디 언니인 에밀리나 ?馝?는 한글을 좋아하고 서투르지만 써보려고 시도를 하는 아이였던 것이다.

혼자 남았지만 이제 남은 한달여기간 최선을 다해 한글을 가르치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한번 곁길로 새보자면 그래도 그때  20대 중후반 강남에서 만났던 아이들중 연예계에서는 '포도밭 사나이' 주연을 맡았던 뮤지컬배우 오만석, 아버지가 외교관이어서 일찍 언어와 주체못할 끼를 발휘해준 두 자매 가수 소이, 해이(본명 김혜원, 가수 조규찬과 결혼했고 쥬뗌무를 부름)등과의 만남들이 기억에 남는다.

MC로도 재능을 보이는 소이양은 당시 너무 어린 중학생이라 그리 살갑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에밀리가 또 노크를 한다.

어느 여자분과 함께 왔는데 자기 이모라고 한다.

"아, 반가워요. 근데 무슨 일로...?"

파라라는 이름을 가진 에밀리 이모는 여자 변호사였다.

아리랑 TV를 즐겨보면서 한국의 팬이 되었다는데 마침 바로 주변에서 한국어를 무료로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배울 수 있을 까 싶어서 의사타진차 찾아왔댄다.

거절할 이유도 없고 내 귀국시간이 다가와 시간이 없지만 바로 공부를 하자고 하였다.

근데 옆에 있는 에밀리가 미적거리는 모습이 보아하니 계속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다.

"이모가 혼자 힘들테니 같이 할 수 있으면 다시 공부하자. 난 언제나 비엔베니도(환영)야."

녀석은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여동생 웬디대신 이모를 데리고 그렇게 내앞에 나타났다.

다만 내가 그 처녀변호사보고 당연히 이모라 나이가 많을 줄 알고 애가 몇명이나 되냐는 결례를 범한 것이 미안할 따름이다.

결혼도 안한 처녀이모는 내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돌아가는 길에 심각히 물어봤댄다.

"에밀리, 내가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니?"    


우리 한국인 스탭들이 방문하였을 때 그들은 시디가 삽입된 한국어 교재를 몇권 사왔다.

통일교 계통 대학에서 발간한 교재지만 역시나 틀이 있으니 너무도 수월하고 지루할 틈이 없었다. 전직지방 시장딸인 꼰수엘로가 시간은 없고 한글을 배우고 싶어해 책을 건네주니 머릿말을 읽다가 당장 문선명 목사가 누구냐고 한다.

대충 영어와 에스빠뇰로 전달하니 어머니가 아시아, 특히 일본 통이라서 이미 그니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질문을 한것이다.

예정된 귀국날짜가 다가와 소설속 프랑스어 '마지막 수업'처럼 내 옥탑방에서 내려 학습장소인 거실에 들어서자 에밀리가 칠판에 쓴 글이 시야에 들어온다.

'Adios! 또 만나요.'


리마로 떠나는 전날 에밀리네 식구랑 송별식을 가졌다. 여기에서 관계를 쌓은 모든 이들과 일일히 인사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몇몇과 인사를 나누며 보니 진짜 떠난다는 실감이 난다.

당일 에밀리 엄마는 앞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 비록 한달 5만원의 후원금이지만 둘째학비를 책임지겠다는 약속이 너무 고맙다며 웬디와 인사를 하러왔다.

말만 프리랜서 언론인이지 벌이가 시원찮은 후안기자의 수입으로는 웬디가 가고 싶어한 사립학교를 보낼 수 없었는데 한달 5만원의 돈도 지방도시에서는 싹수있는 아이의 앞을 밝힐 수 있음이 내가 되려 감사한데도 말이다.

다행히 ?馝? 고등학교 수업료도 내 뜻에 동참한 시골목회자인 형(조카의 아빠)이 이 책임지기로 하여 학비 후원자가 생겼다. ?馝?아빠에게 내가 떠나고 나서 딸에게 알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에밀리가 써준 작은 카드를 내놓는데 거기 겉봉에 적힌 아이의 서투른 한글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사진에 첨부한 그대로 짧지만 눈시울을 적실만큼의 감동스런 문구였었다.

표현 하나를 찾으려 이리저리 뒤졌을 녀석의 모습과 애틋한 마음들이 선하게 그려진다.    


5개월동안의 한글교실을 접고 이제 한국에 왔다.

에스빠뇰로 안부메일을 사랑스런 아이들과 자주 교환하고 또 연말에 만나겠지만 혹여 녀석들이 한국어 표현들을 다 잊어 버렸다고 해도 함께 한글을 써가며 나눈 정감어린 시간들만큼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한국어 표현은 안 잃어버렸으면 좋겠다.


"작은(큰)아빠, 많이 보고 싶었어요~"

http://cafe.daum.net/7080folksong 

출처 : 박우물의 7080 이야기
글쓴이 : Rail Art박우물 원글보기
메모 :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