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부모에게 자식의 교육만큼 큰 화두가 있을까?
초등학교 근처에만
가봤지만 제대로 배움의 기회마저 없었던 우리 아버지도 자신이 가진 지식을 아들에게 자신의 방법으로 알리려 했던 것은 예외가
아니셨나보다.
살갑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여름날의 가위눌림처럼 항상 우리 가족을 그리도 버겁게 칡넝쿨처럼 옥죄이던 아버지, 안정효의
소설중에 '악부전'을 연상케 하였던 그분에게도 자식을 향한 몸짓이 있었던 것이다.
사춘기시절 나나 우리 가족들에게 아버지는 공포와 탈출의 대명사였지만 전혀 아버지가 되거나 남편이 되는 훈련을 못 하신 불학의 탓과 간난의 세월탓으로 돌려보고 싶다.
그런데 그런 일탈 가운데도 당신이 보인 한가지 일로
사람을 평생 감동케 할 사건이 있다면 아마 둘째아들인 내게 아버지의 지금 그리는 행적은 당신이 왔다가 돌아갈 흙의 신분이 되어도 잊혀지지 않을
그리운 사건일 것 같다.
흔히들 '고창수박'이라 유명세를 치루는 수박의 주산지는 정확히 고창군 대산면 칠거리라는 지역에서
시작된다.
박정희 대통령이 농촌을 살린다며 시작한 '새마을 운동'의 드센 파고는 주변의 숲정이들을 모두 야산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채마밭으로
만들었지만 '섬마을 '이라는 독특한 땅이름을 가진 우리동네 뒤에서 칠거리까지 신작로는 중간에 마을 하나 없이 한낮에도 칙칙한 느낌을 줄 정도로
메숲진 곳이다.
칠거리는 전에도 언급을 하였지만 길이 일곱갈래로 만들어진 곳이다.
그러나 인가는 드문드문 있을 뿐인데 에둘러선
주변마을들은 모개(다른 곳으로는 갈 수없고 꼭 거쳐야 할 길목)인 탓인지 이쪽을 통해 대산 장을 보러 다녀서 그곳에는 이발소와 가게, 그리고 뱀
잡는 땅꾼의 집, 그리고 나중에 들어선 자전거집 등의 편의 시설이 있었다.
이발을 가자시며 아버지가 채근을 하신다.
이발소는
바로 앞 동네에도 있는데 굳이 칠거리까지 먼길을 고집하는 것은 같은 집안의 아저씨뻘이 운영하는 이유였을 게다.
아마 내가 학교를 다니지
않는 나이였거나 휴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키지 않았지만 단 둘이서 어색히 길을 나섰다.
아마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약주가 과하지
않은 평범한 촌부였을 것이다.
그전까지 길바닥엔 잡초도 푸르더니 신작로는 벌건 흙들과 자갈들만 내보이며 숲으로 숲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 자네 왔구만. 이발 할라고."
"예. 아제, 우리 아그새끼도 해주씨요."
아버지는 먼저 이발을 하고
동백기름인지 포마드인지를 바르고 연이어 나에게 차례를 넘겼다.
"이발하고 있어라이. 내가 잠깐 딴 데 있다가 올테니까."
차가운
금속이 밤송이같은 내 머리털을 잘도 헤집고 다니더니 어느새 빡빡머리로 둔갑을 시킨다.
남의 머리카락들이 찌끼로 남겨져 있는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고 난 후 아버지를 기다리느라 바깥에서 하릴없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점심도 넘었는지 식사를 하고 나온 아저씨뻘 되는
가게주인은 나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멋 하고 아직 안갔냐?"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시골 촌아이는 그제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부이가 데리고 간다고 했어라-"
"먼 소리냐. 이발하자마자 너 보고 혼자 오라고 말하고
갔는디."
"............"
다른 토도 달지 못하고 그때사 나는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강구했다.
그날따라 동네에서 이발
온 사람도 아무도 없어서 결국은 혼자 동네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길이야 따라 가면 그만이지만 길섶의 파헤쳐진 무덤들이나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인적 드문 호젓한 산길은 어린애에겐 겁만 안겨주는 곳이었다.
푸드득 하는 소리에 기겁을 하니 오히려 인적에 놀란 꿩이라는 놈이 저도
놀라 티를 내며 날아간다.
신경이 곤두서다 보니 아까부터 숲에서 계속 바스락거리는 소리들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무섬증이 왈칵 들어
몇 발자국은 달음박질을 하였지만 곧 숨이 차서 포기를 하였다.
그때부터 노래를 불렀다.
아는 노래가 별반 없다보니 아마 나중에는 아예
울음반 노래반으로 계속 주위의 고요를 깨트리고자 했던 것 같다.
멀기만 했던 길도 땔감을 하러 형이랑 왔던 낯익은 지점까지 오니 이젠
울음이 조금씩 멈춰졌다.
완전히 무서움이 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는 곳까지 혼자 온 것이다.
누군가 저쪽에서 지게를 지고
온다.
그때부터 노래도 소매로 눈물을 훔친 후 멈추고 그 사람이 다가오자 꾸벅 절을 하였다.
'세나지'라는 갈림길에서 집까지 잇대어진
내리막길을 줄달음에 달려 싸리문을 열었다.
동네에서 제일 위에 위치한 우리 집엔 마침 형도 학교에서 오고 어머니도 마당에 곡식을 널고
있었는지 동네 아낙 두엇과 함께 있었다.
"아~앙."
여름날 핀둥이가 매암 돌 듯이 다짜고짜 나는 마당에 등을 댄 채 빙빙 돌며 온갖
설움을 토해내듯 울어댔다.
"아부이가-아부이가-아...앙."
이상한 것은 어머니나 형 모두가 그렇게 섧게 우는데도 모두들 재밌다는 듯
쳐다보며 달래주는 척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에 더 서럽게 땅바닥에서 뒹구는데 삽짝문을 여고 바로 들어오는 이는 머릿기름이 채 마르지
않은 아버지셨다.
"두째야. 나 산 속에서 계속 따라왔다. 너한테 길 알려줄라고 일부러 그런 것이다이."
아버지와 식구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내 울음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 호방하게 웃으며 나를 달래는 것에는 관심도 없는 양 오후의 햇살을 온 몸으로 맞고
계셨다.
그때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더 젊거나 비슷했을 것이다.
몇년전부터 아버지는 목회를 하는 고창
큰 형님의 활뫼동네에서 큰 아들과 손주들이 우려하는 마실을 자주 나가셨다. 동네가 생긴 이래 처음 119차나 경찰차를 타고 들어오시는 모습으로
우리 자식들의 어이없는 웃음을 유발하시는 낯설은 길을 지금도 준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예전에 써 본 칼럼을 꺼내보는 지금 이 시점, 아버지는 이제 곡기도 못 받아주는 말기환자로 서서히 육신이 고통과 허물을 한꺼풀씩 벗어내고 있다.
그날 내가 동네로 돌아가는 길은 아버지가 숲에서 봐주었지만 당신의 취한
하루하루 길과 기억나지 않는 하늘길은 누가 봐 주고 누가 길라잡이가 돼줄까?
-박우물-
그들의 아리랑 (0) | 2006.02.03 |
---|---|
사망부가 (0) | 2005.12.03 |
늙어 시골이나 내려간다구요? (0) | 2005.04.12 |
헌 책방 골목에 들어서며 (0) | 2005.03.28 |
노래하는 피아노맨 (0) | 2005.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