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사망부가

박우물(둘째형)

by 종이인형 꿈틀이 2005. 12. 3. 10:12

본문

 

이번 3형제 칼럼은 작년에 쓴 글이지만 형은 ‘아버지와 목욕탕’을, 동생은 채 부치지 못해, 영전 앞에서 읽어드리지 못한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이번 호에 썼다.

나도 11월호에 임종을 준비하며 몇 년 전에 쓴 길라잡이 아버지란 칼럼을 게재하였지만 이번 달 만큼은 세 형제가 모두 아버지를 주제로 동일한 호흡을 맞추고 싶다. 여동생은 장례식내내 눈물과 몸짓으로 모든 이야기를 하였으니 여기 사부곡을 부르는데는 형제트리오 목소리만 차용한다.

장례식은 애통의 자리가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이-불가에서 말하는 험난한 고해의 바다를 벗어나-영원한 천국으로 간다고 믿기에 가르침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딱 10분만 울고 나머지는 축제처럼 그대로 실행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제비’와 ‘올드랭 사인’을 멕시코 마리아치 팀이 연주와 노래를 불러주었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었다.

글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에 대한 몇개의 삽화를 통해 관계성의 반추를 해보고 싶다.


 

“일어 나거라, 비 오니까 논에 가자.”

길라잡이 아버지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아버지 나름대로 아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가르쳐주려는 의도에서인지 나를 데리고 이른 새벽, 개샘을 지나고 신작로를 건너서 야산개발지 제일 하단에 위치한 전답으로 삽 한 자루 쥐고 앞장서 걸었다. 그러면 나는 비몽사몽간에 싫다는 말도 못하고 논두렁에서 물꼬를 트는 아버지의 모습을 우중에 졸린 눈 비비며 우두망찰 서있었다.

굳이 데리고 가지 않고 당신 혼자 하는 일이니 잠자는 아들을 편하게 자게 내버려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아마 형은 장자라서 이런 경험이 더 많을 것이다.

“니가 나중에 농사꾼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배워서 나쁠 건 없을 것 잉께.”

그것이 아버지가 나를 의도적으로 그 새벽, 아니면 늦은 밤에 들판에 세워 둔 까닭이다.

아니다. 지금은 달리도 바라보게 된다. 어쩌면 지금의 내 나이쯤이나 더 젊었을 때의 당신도 혼자 나서는 길이 허허로워서였을 거라는 생각이.


 

“제발 그만 하라구요.”

빽 소리를 치며 정지로 통하는 문을 걷어차고 부리나케 밖으로 도망을 나갔다. 무엇이 싸움의 발단이었는지 모르지만 십중팔구는 주체 못할 아버지의 주벽이었다. 자정쯤 귀가를 하여 곤히 잠든 우리를 보면 무에 그리 심사가 불편하였는지 모든 식구를 죄다 깨우고 급기야 손찌검으로까지 확산되면 여기에 맞서는 어머니는 아버지의 우악스런 체구 앞에 작은 몸짓에 불과하였다. 중학생이 되어서 조금씩 내 목소리를 내고 그 가위누름의 현장을 몇 번씩 피하다가 일탈을 꿈꿨다.

첫 탈출지는 광주 충장로의 어느 중국집에서였다.

1주를 채 못 채운 가출행각은 어머니가 그곳까지 찾아옴으로 일단락되었고 방에 들어가 아버지께 무조건 사죄하라고 권하였지만 내 기억에는 집을 나간 것에 대해서 도대체 왜 잘못했다고 해야 하는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채근을 하면서 나에게 잘못했다 말하라고 종용할 때도 아무 말 안하고 있었다. 둘째 아들의 가출은 부모역할에 대해서 잘 체득하지 못한 당신으로서는 당혹스러운 사건이었고, 당신의 취중 행동이 원인이 된 거라 혹여 14살 아들이 다시 집을 나가는 일이 발생할 까 꾸지람도 못하고 겁을 내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버지로 보면 엎드려 절받기 식의 타의적인 사과를 문제 삼지 않고 넘어 간 것 같다. 그렇게 어색한 며칠이 가고 이번에도 취해서 들어온 아버지는 그 서운함을 실어 무심결 말을 날렸다.

“끝까지 미안하다고 말도 안 한 독한 놈.”

그것은 나와 아버지의 관계가 평생 어떻게 유지될 것인가에 대한 예언처럼 당신의 입을 통해서 나온 소리였다.

그랬던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잘 못한 일이 많았을 텐데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단 한번도 하지 않고서 40대에 접어들었고, 시골로 귀향을 한 후 형의 교회 건축을 돕기 위해 내려 온 내가 아버지의 작은 행위로 인해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형의 집에까지 내려와 되려 나에게 사과를 하였다.

당신의 입에서 ‘종호야,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라는 소리가 나오자 시시비비를 떠나 바로 발걸음을 멈춘 그날, 믿기지 않는 모습에 한동안 생각에 잠겼었고 아버지의 늙음을 새삼 깨달았다.  


 

“너 이 자리에서 한자로 우리 집 주소 써봐라.”

빈 지게를 지고 오다가 비석등 있는 데서 아버지는 갑자기 발을 멈추더니 땅바닥에 나무 꼬챙이로 이런 주문을 하였다.

중학교 2학년이라 해도 한문과 유리되었던 나는 거기에서 못쓴다는 소리 대신 먼저 아버지의 의중을 파악하기에 바빴고 아버지가 전혀 모르는 영어로는 쓸 수 있지만 한자는 별로 쓸 일이 없어 그런 것 학교에서 못 배웠다고 우기었다.

유복자처럼 살아 온 아버지는 남의 일꾼이나 할 애가 웬 교육이냐며 학교를 못 가게 한 위 형 때문에 소학교 운동장 그네에 홀로 앉아 내내 울었다는 말을 그날도 하였다.

그래서 당신 나름대로는 아들이 공부를 진짜 하는지, 싹수가 있는 녀석인지 당신이 스스로 체득한 한자로 알아보려 했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무학에 대한 자존심만 건드리며 버틴 것이다.

자식들이 학교를 다니면 용돈이 필요하다는 것도 몰랐던 아버지였지만 그날의 빈 지게는 떨치지 못한 삶의 무게와 자식교육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결코 녹녹치 않은 높이로 당신의 어깨를 짓눌렀을 것이다.

학부에서 내가 전공하는 학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문화라는 뜻도 어쩜 아버지는 모르셨을 것 같지만 그 나무 밑에서 학벌로만 4남매 모두 초대졸부터 대학원과정까지 현재도 밟고 있는 것을 표현에 서툰 당신도 자랑스러워 하였을까?


 

“아버지 천국 가신다고 믿으세요?”

11월 1일 저녁, 광주시민의 날 도시철도 행사를 마치고 당신의 둘째 며느리를 데리고 고창 시골집에 들러 문을 열어보니 아버지는 며칠 전 본 것과 확연히 달리 육신과의 이별을 서두르는 것처럼 보여 이리 물으니 대답할 힘도 없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불현듯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잘 준비하시고 하늘나라 가시라고 기도를 하자 힘겨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기에 동조하신다.

그것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도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기도였다. 채 24시간도 안된 그 다음날 점심때 아버지는 기도한 내용처럼 하늘나라에 가셨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끝까지 아버지에게 사과 한번 안하고 고집스레 버티던 둘째 아들의 진심어린 기도에 만족하셨는지, 진즉 화해하였지만 입술을 빌어 죽음 자체를 인정하고 축복하는 아들의 모습이 대견스러웠는지, 아버지는 미련없이 마지막 육신의 옷을 훨훨 벗어 던진 것이다.


 

정태춘이 만든 ‘사망부가’는 대부분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으로 일관된 곡에 대해서 아버지를 담담히 그리는 사부곡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3주전부터 그곡을 나름대로 공연장에서 불렀고 장례식후 서울에 올라와 사당역에서 또 이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저 산꼭대기 아버지 무덤

-거친 베옷입고 누우신 그 바람모서리

-나 오늘 다시 찾아왔네

-바람거센 갯벌위로 우뚝 솟은 그 꼭대기

-인적없는 민둥산에 외로워라 무덤하나

-지금은 차가운 바람만 불어올뿐.....

 

이제는 아버지 맘 상하게 한 것을 사과하고 싶고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렇게 나름대로 4남매를 반듯히 키워주신 것을 감사하고 싶은데, 그 고백은 버거운 질곡의 더께를 벗어버린 당신에 대해서는 축하할 일이지만, 남아있는 아들은 용서의 대상을 면전이 아닌 허공에다 대고 고백해야 하는 안타까움으로 웅얼거린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 자존심 때문에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사과 한번 하지 못했던 것을...”  


반응형

'박우물(둘째형)' 카테고리의 다른 글

Rail Art 창작 가요제  (0) 2006.02.22
그들의 아리랑  (0) 2006.02.03
길라잡이 아버지  (0) 2005.11.21
늙어 시골이나 내려간다구요?  (0) 2005.04.12
헌 책방 골목에 들어서며  (0) 2005.03.28

관련글 더보기